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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 삭발- 김희진(정치부 기자)

기사입력 : 2019-09-18 20:19:46

영화 ‘아저씨’의 명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배우 원빈이 거울 앞에 홀연히 서서 바리캉으로 직접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순간이다. 세상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머리칼로 얼굴을 가리고 살던 주인공 태식이 납치 당한 이웃집 소녀를 찾고 악인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극의 반전 포인트가 바로 이 삭발 신(scene)이다.

▼삭발은 두피가 드러날 정도로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깎는 것을 말한다. 큰 가위라는 뜻의 라틴어 ‘Tonsura’에서 유래됐다. 영화 속 원빈처럼 삭발은 특별하고 강건한 의지의 표명이다. 승려는 종교인의 삶을 시작하며 삭발식을 하고, 중세 기독교에서도 성직자의 삭발은 세속과 선을 긋는 행위였다. 우리나라 남성들은 입대 전 삭발로 삶의 전기를 맞고, 노동계에서는 강력한 투쟁방식이기도 했다.

▼조국 장관 임명철회를 촉구하는 정치인들의 삭발이 잇따르며 ‘삭발 정치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첫 주인공은 1987년 대선 때 야권단일화를 요구하며 머리를 깎은 박찬종 전 통일민주당 의원이다. 이어 1997년에는 김성곤 전 국민회의 의원이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며, 1998년 정호선 전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공천헌금 의혹에 결백을 주장하며, 2004년 새천년민주당 설훈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철회를 주장하며 삭발했다. 2010년 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한 한나라당 의원들, 세종시 수정안에 반발한 자유선진당 의원들, 2013년 정당해산 청구에 항의한 통진당 의원들이 머리를 깎았다.

▼한동안 잠잠했던 정가의 삭발은 올해 유독 잦다. 5월 패스트트랙 처리 무효를 주장한 한국당 의원들의 삭발식에 이어 조국 정국에서는 무소속 이언주 의원에 바통을 넘겨받아 한국당 의원들이 삭발 릴레이를 하고 있다. 특히 제1야당 대표로서 황교안 대표의 삭발을 놓고 ‘후진적 정치다’, ‘투쟁의 결기를 보였다’고 왈가왈부한다. 이번 삭발 릴레이가 새로운 투쟁사로 기록될지 정치쇼로 끝나 조롱거리로 남을지는 지켜보는 국민의 판단에 달렸다.

김희진(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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