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국가기념일 제자리 찾은 1979 부마항쟁] (상) 유신독재 무너뜨린 시발점

1979 부마항쟁 독재 맞선 최초·최대 시민저항

1979년 10월 16·18일 부산·마산서

기사입력 : 2019-10-13 20:48:56

1979년 10월 16일과 18일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박정희 유신체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부마민주항쟁. 1970년대 유신체제의 폭압 속에서 자유와 민주, 정의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사실상 유신독재의 붕괴를 아래로부터 촉발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피해자와 유족들은 당시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올해로 40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히고 있다. 그랬던 부마민주항쟁은 4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이에 부마민주항쟁의 국가기념일 지정까지의 과정과 함께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고 전문가 의견을 통해 앞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를 살펴본다.

1979년 10월 18일 마산민주항쟁이 시발된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교 교정. 오는 16일 이 학교 대운동장에서 첫 부마항쟁 국가기념식 개최를 앞두고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줄지어 걸려 있다./김승권 기자/
1979년 10월 18일 마산민주항쟁이 시발된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교 교정. 오는 16일 이 학교 대운동장에서 첫 부마항쟁 국가기념식 개최를 앞두고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줄지어 걸려 있다./김승권 기자/

◇민주화운동 시발점 ‘부마민주항쟁’= 박정희 18년 유신독재에 맞서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에서 시작된 부마민주항쟁은 부산의 도심으로 번졌고, 18일에는 마산까지 번지면서 유신독재 최초이자 최대의 시민항쟁으로 타올랐다. 초기엔 학생들이 주동이 됐지만 차츰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범시민적인 민주화운동으로 승화됐다. 불과 며칠 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쓰러지면서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다. 부마민주항쟁의 10월 정신은 이듬해 5월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전두환 등 신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은 더 강력해졌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과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은 모두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1987년 6월 전국적인 규모로 계승된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은 이 땅에서 군부독재를 영원히 몰아냈다.

부마민주항쟁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이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군부독재의 사슬을 끊어내고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면면히 이어질 수 있게 한 시발점이자 원동력이었다. 더불어 4·19를 포함해 한국 현대사 4대 항쟁 중 하나로 꼽히지만 국가기념일 지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정부 차원에서는 진상규명에 적극 나서지 않았고 세월이 흘러 행정구역이 변경되면서 부산과 마산(현 창원시)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국가기념일 제정에 어려움이 예상됐다.

그러나 이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의 중재로 최초 부마항쟁의 시작일인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는 방안이 추진됐고 이에 지자체와 시민들도 공감대를 형성해 힘을 모았다. 또 온·오프라인을 통해 진행된 부마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서명운동에는 60만명이 동참했다. 부산과 경남뿐만 아니라, 서울, 광주, 제주 등 전국 각지는 물론 일본과 대만 등에 있는 해외동포들도 온라인 서명에 참여하는 등 국가기념일 제정에 동참했다.

◇‘부마항쟁 사망자’ 첫 인정= 부마민주항쟁 당시 주검으로 발견돼 현재까지 유일한 희생자로 알려진 고(故) 유치준(당시 51세)씨가 지난 9월 5일 국가로부터 사망자로 최초 인정받았다. 이는 억압적인 유신체제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선 부산 및 마산지역 시민을 국가가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공권력을 투입하는 상황에서 국가책임을 인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지난 40년간 정부는 ‘부마항쟁과 관련된 사망자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허진수 진상규명위 위원은 “광주와 비교하면 정부의 부마항쟁 진상 규명에 대한 지원은 매우 미미한 편이었다”며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만큼 진상규명위의 권한을 보강하고 올해 말로 종료되는 활동이 연장될 수 있게 조속한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기념일 지정 의미= 행정안전부가 지난 9월 17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부마민주항쟁 기념일 제정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령안을 심의·의결했다. 부마민주항쟁이 국가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에 오는 16일 경남대학교에서는 ‘부마1979, 위대한 민주여정의 시작’이란 슬로건으로 부마민주항쟁 제40주년 기념식이 첫 국가기념행사로 치러진다. 특히 이번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은 국가기념일 지정과 동시에 40주년을 맞아 의미를 더하고 있다. 독재체제의 불합리성뿐만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반발의 결과라는 점에서 부마항쟁은 향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원형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전두환 신군부에 맞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내년이면 40주년이 된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2개 민주화운동 모두 진상규명에 대해서는 갈 길이 멀다.

경남대 내 월영지 옆에 세워진 부마항쟁 시원석(始原石). 지난 2009년 부마민주항쟁 30주년 기념사업으로 세워졌다.
경남대 내 월영지 옆에 세워진 부마항쟁 시원석(始原石). 지난 2009년 부마민주항쟁 30주년 기념사업으로 세워졌다.

이은수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비공식적으로 김대중 대통령 등이 참석한 적은 있다. 정권이 바뀌고 제도화가 안 되다 보니 공식적으로 기념일이 되지 못했다”며 “부마민주항쟁이 이제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기념일로 바뀐 것이다. 이번 국가기념일 승격으로 큰 틀이 만들어져 제도화가 됐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민영 기자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민영 기자의 다른 기사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