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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시거리’란 말을 살려 바다를 살아있게 하라- 정일근(시인·경남대 석좌교수)

기사입력 : 2019-10-27 20:19:09

중학생 때 내가 사는 조그만 항구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 친구들에게 ‘시거리’란 말 하나를 배웠다. 그때도 시인이 꿈이었던 어린 나의 영혼을 순식간에 황홀하게 감염시키는 말이었다. 그건 바다에서 파란색으로 반짝이는 빛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바다를 향해 물수제비를 뜨며 파랗게 반짝이는 시거리를 보여주었다. 나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친구들은 물수제비뜨기 좋은 납작한 돌멩이들을 모아서 작은 나무배에 탔다. 노를 저어 바다로 가 물수제비로 시거리를 만들며 나를 달뜨게 만들어주었다. 달이 없는 밤이었다. 친구들은 당시 시거리를 바다 도깨비불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사전에서 시거리란 말을 찾지 못했다. 당시 우리들은 경상도 아이들답게, ‘ㅓ’ ‘ㅡ’ 의 조음 위치를 혼돈해 ‘시그리’라 불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오랜 세월이 지나 국어학을 전공한 후배가 ‘시거리’란 바른 말을 찾아 주었다.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 기록된 시거리는 ‘야광충의 북한어 방언’ ‘그믐이나 달이 뜨지 않았을 때 바다에서 파도나 돌, 모래 등의 자극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플랑크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시거리불’이란 말도 있는데 그건 ‘반딧불이’의 전남 방언이었다.

나는 진해바다에서 본 시거리가 야광충의 북한어 방언이란 국립국어원의 소개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내 고향바다의 말이기도 하다. 당시 행정소속이 다른 가덕도 면소재인 천가면에서 자란 박형권 시인은 나와 똑같은 100%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놀랐다.

그의 시집 ‘가덕도 탕수구미 상향’에 같은 제목의 시가 있다. 시거리를 ‘달이 뜨지 않는 그믐밤이면 바다는 스스로 밝다/파도에 뛰어든 뿌우연 인광이 항구의 앙가슴처럼 스스로 무너진다/…/가덕도 사람들은 어두운 밤바다의 인광을 시거리라 불렀다’라고 했다. ‘빛도 바다의 일부라는 것을 어부는 안다’ ‘바다는 살아있는 빛을 모국어로 썼다/모두 몸으로 뒤채는 언어였다’ 등 시거리 같은 시가 살아 빛난다.

나는 국립국어원(원장 소강춘)에 제안한다. 시거리를 야광충의 북한어 방언이란 소개보다 보다 폭넓은 조사로 남북이 같이 쓰는 살아있는 우리말로 되살려주길 바란다. 또한 창원시에 시거리를 찾아 우리 지역민이 즐기는 ‘시거리 바다축제’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우리 아이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며, 말 하나가 우리 바다를 맑고 푸르게 되살려낼 것인가.

같은 대학에서 해양자원을 연구하는 이승철 교수는 “시거리(플랑크톤)가 살아있어야 바다와 바다에서 살아가는 자원이 풍요로워 진다.”고 말했다. 나는 말의 힘을 믿는다. 그래서 말의 힘은 크다는 것을 안다. 만신의 주술과 다를 바가 없다. 시거리란 말이 우리 입에서 다시 살아난다면 바다를 살리는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또한 관광자원이 되겠는가.

분노라는 말을 알았기에 마산은 3·15와 부마항쟁이 일어나 국가기념일 2개를 가진 민주화의 도시가 되었다. ‘가고파’의 노래가 있어 그리움의 바다를 가졌다. 시거리가 있어 나는 아름다운 바다를 만났다.

이제 잊힌 시거리를 찾아야 한다. 전문가에게 의뢰해 시거리 발생지역을 찾고 축제의 방향을 잡아가야 한다. 그것이 행정이 할 일이다. 한국의 축제가 어딘들 도진개진이다. 한국에서 벤치마킹은 표절의 이음동의어다. 축제에 대한 특허도 필요하다. 다른 도시가 하지 않는 독창적인 축제가 경쟁력을 가진다.

시거리! 나는 시거리가 살아있는 바다를 다시 보고 싶다. 생애 최고의 헌시를 바치고 싶다. 이게 시인의 감성적 사치라고 생각한다면 시거리를 보고 나를 탓하라. 앞에 소개한 박형권 시인의 표현대로 시거리는 바다의 언어다. 이제 그 언어에 우리가 답할 때다.

정일근(시인·경남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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