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다른 가을을 사진에 담다- 김태희(실학박물관장)

기사입력 : 2019-11-10 20:26:50

불안불안 걷는다. 눈 아래로 파란 가을하늘이 탁 트였다. 좀 걸으니 붉은 단풍나무가 선명한데, 그 위로 발을 내딛는다. 허공을 걷는 듯한 신기한 경험이었다. 눈 바로 아래 작은 거울을 두어 아래로 하늘이 보이도록 한 것이다. 한 손은 앞사람의 어깨를 잡고 있었기에 겨우겨우 전진할 수 있었다. 익숙하지 않기에 불안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신선했다. 바로 ‘실학과 사진’이란 강좌에서 이뤄진 체험이었다.

멋진 풍경을 보면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게 된다. 이제 사진 찍는 것은 전문가나 애호가만의 특별한 활동이 아니다.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언제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실학박물관의 ‘실학생활강좌’에 카메라 강의를 넣은 배경이다.

‘카메라’라는 이름은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말에서 왔다. 라틴어로 ‘어둠(obscura)의 방(camera)’이란 뜻이라 한다. 다산 정약용의 글에 ‘칠실관화설(漆室觀說)’이 있는데, ‘칠실’은 ‘카메라 옵스큐라’와 같은 뜻이다. 글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맑은 날에 방에 들어가 밖으로부터 오는 빛을 모두 차단하여 방을 칠흑같이 한다. 오직 한 구멍을 내어 애체( 체, 렌즈)를 구멍에 안정시킨다. 그리고 하얀 종이판을 애체와 적정한 거리를 두고 설치하여, 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종이판에 비치게 한다. 그러면 바깥의 아름다운 풍경이 종이판 위에 나타나, 색깔과 형태가 그대로인 한 폭의 그림을 이루니, 천하의 기이한 볼거리이다. 비친 사물의 형체가 거꾸로 되어, 황홀한 느낌이 든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는 르네상스 화가들에 의해 이용됐다. 다산은 정확한 초상화를 그리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고 했다. 다만 대상이 뜰에 단정히 앉아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애로사항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초상화를 그린 사례를 다른 글에서 전했다.

카메라는 사람의 눈이 보는 것에 최대한 가깝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것과 카메라로 찍는 것은 다르다. 사람의 눈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나머지는 무시해버린다. 그래서 나중에 사진을 보면서 찍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을 뒤늦게 발견하곤 한다. 이러한 선별적 감각 현상은 나름 합리적이지만, 사람의 감각기관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진도 현장을 온전히 그대로 전하지는 않는다. 강좌에서는 사진의 프레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체험해보았다. 큰 사진에서 작은 사각형 프레임을 이모저모로 적용해보는 것이었다. 가령 할머니가 동네사람들과 여유롭게 담소하고 있는 큰 사진에서, 작은 프레임을 움직여 할머니가 주변부에 배치되고 동네사람들은 제외되도록 설정하고 나니, 참으로 외롭고 쓸쓸한 장면이 되어 버렸다. 동일한 현장도 프레임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메시지는 달라지는 것이다.

곧바로 카메라로 대상을 보려 하지 말고, 먼저 눈으로 풍경을 잘 살피라고 강사는 충고했다. 이는 좁은 프레임에 갇힐까 경계한 것일 게다. 박물관 밖 실습에 임하면서는, ‘평범하지 않게, 다르게’ 프레임을 잡아보라고 강사는 주문했다. 다르게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리는 늘 보던 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진부함을 낳고, 심한 경우에는 완고함과 폭력적 배제를 낳을 수 있다.

실학박물관 울타리의 살을 장식한 문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公觀竝受, 공정한 마음으로 보아 두루 받아들인다.” 다른 프레임으로 보려는 놀이 또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로 인해 우리의 안목, 우리의 삶이 더욱 여유로워질 것이다.

사진은 진짜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진은 진실을 매개하고, 무엇보다 사진은 지나간 어느 순간의 일면을 포착하여 정지화면으로 보여준다.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하는데, 이렇게라도 과거를 추억하도록 붙잡아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해마다 반복되는 가을이지만, 지난해와는 다른 올해의 가을을 사진으로 담아보련다.

김태희(실학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