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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⑭ 파리장서운동 출발지 산청

파리 보낸 ‘독립청원서’ 산청 유림이 주도했다

독립청원서 작성 주도한 곽종석

기사입력 : 2019-11-12 21:40:41

산청은 3·1운동 당시 면우 곽종석 선생이 파리강화회의에 장서를 보내 조국의 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운동’의 출발지가 된 곳이자 유림 독립운동의 중심이 된 곳이다.

앞서선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손꼽히는 남명 조식 선생이 산천재에 기거하며 영남 3대 의병장으로 불리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수많은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항일 독립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왔다.

산청공원에 있는 수계정. 이곳은 독립운동 결사대의 비밀회합 장소였다.
산청공원에 있는 수계정. 이곳은 독립운동 결사대의 비밀회합 장소였다.

◇파리장서운동= ‘나라가 없으면서 사는 것은 나라가 있으면서 죽는 것만 못합니다. 치우친 구석에서 스스로 말라주는 것이 공정하게 듣고 아울러 보는 곳에다 몸을 바치는 것과 어찌 같겠습니까? (중략) 이에 감히 짧은 글을 지어 마음을 같이 하는 말을 모으고 십년 동안 살면서 받은 실정을 갖추어 하늘끝 만리 바깥에 인편으로 보내는 바입니다.’ 이것이 1919년 3월 면우 곽종석 선생을 비롯한 137인의 유림 대표가 작성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전문 2674자 한문의 한국독립청원서를 한글로 번역한 일부 내용이다.

유림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는데, 일제가 1차 세계대전의 종식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식민통치 문제가 대두될 것에 대비해 유림 명의를 도용하고 일본 정부에 소위 독립불원서, 즉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서면을 조작해 제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에 반발한 유림들이 승전국들에 우리 민족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곽종석은 이 독립청원서의 원고를 완성하고 여기에 연서한 137명의 유림 중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다. 주요 내용이 한국의 실정과 일본의 침략성을 국제정의에 기준해 호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청원서 마지막은 “차라리 목을 함께 모아 죽음으로 나아갈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며 끝맺는다. 곽종석은 제자인 심산 김창숙으로 하여금 청원서를 한 줄씩 오려 짚신날에 감추어 일제 감시를 피해 가져가기 편하도록 준비했다.

김창숙은 1919년 3월 27일 경성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한 이후 현지 독립운동가들과 상의 끝에 여건을 고려해 자신이 직접 파리로 가는 대신 독립청원서를 영어·독일어·프랑스어·중국어 등 4개 국어로 번역하고 수천 부를 인쇄했다. 신한청년당 대표로 뽑혀 이미 파리에 파견돼 있던 김규식에 우편으로 전달을 했고 각국 공관과 언론기관은 물론 국내 각지 향교로 원문을 우송해 국제사회에 조국 독립의 마땅함을 널리 알렸다. 이에 일제는 유림의 만세시위 주동자를 붙잡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청원서의 존재를 알게 됐다.

곽종석은 이 청원서가 발각된 이후 4월 18일 주동자로 구속되어 대구감옥에 수감됐고,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병세가 악화돼 같은 해 8월 24일 서거했다.

곽종석을 선두로 청원서에 이름을 올린 많은 유림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고 서명자 이외 많은 인사들이 고초를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거사는 일제 측에서 취조를 할 때 ‘유림단사건’이라 이름 붙여졌다가 해방 이후 독립청원서가 파리에 보낸 긴 편지라는 뜻에서 ‘파리장서’라 명명되어 현재 파리장서운동으로 불린다.

◇신등·단성 만세운동= 산청군에선 또한 신등면 단계리와 단성면 성내리에서 유림세력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있었고, 산청읍에서 동경 유학생과 농민 등이 중심이 된 만세운동이 일었다.

산청군 신등면에 사는 덕망 높은 한학자 김영숙은 1910년 국내외 독립지사들과 비밀 연락을 가지며 조국 광복에 노력해오던 중에 고종 승하 소식을 접하곤 이웃인 윤병모를 찾아가 장남들을 서울로 보내기로 한다.

이들의 장남인 김상준과 윤규현은 서울로 올라 3·1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구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파리장서의 연명운동이 일던 때로 김영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선 전 민족이 의거해야 된다며 파리장서의 연명운동을 일축하고 아들과 함께 의거를 서둘렀다.

김상준 등은 3월 19일 신등면 단계리시장에서 청소년들을 이끌고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할 예정이었으나, 출발 무렵 일본 헌병에 체포되면서 계획이 틀어졌지만, 끌려가는 와중에 굴하지 않고 독립만세를 외쳤고 군중들도 따라 만세를 불렀다. 남은 주동자들이 재의거를 약정한 뒤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어 20일에 시장에 모인 600~700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과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단성면 성내리시장으로 향하니 그 숫자가 무려 수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 이들은 그날 밤을 지내고 다음 날 단성면 성내리 장날에도 1000여명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만세’라 대서특필한 기를 앞세워 시위했다.

◇산청읍내 만세운동= 산청읍에선 동경 유학생이던 오명진이 3·1운동이 일어나자 조국독립을 위해 귀국해 독립선언서를 구두 창 밑에 숨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민영길·신영희·오원탁·최오룡·신창훈·신몽상 등을 만나 독립의거를 역설한 이후 3월 18일 수계정에서 비밀 회합을 갖고 서로 독립운동에 생사를 같이할 것을 맹세하며 결사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산청읍 의거를 3월 22일 장날에 단행하기로 약속했다. 신창훈과 신몽상은 산청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신영희 집으로 가져와 이틀간 작업 끝에 독립선언서와 결의서, 태극기 약 2000매를 등사 인쇄했다. 각면 각리 동지를 규합하며 의거일 동원할 군중도 포섭했다. 그러나 군 전체로 만세시위를 발전시키기 위해 산청군수 홍승균도 포섭키로 하고 독립선언서 1매를 전달했다가 그가 곧바로 이들을 일군헌병대에 고발하면서 주동 인물 전원이 검거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22일 산청읍 장터 거사는 차질이 없었다. 장터는 정오 무렵 농민 등이 몰려들어 군중의 만세시위로 들끓었고, 일제는 헌병대와 수비대를 출동시켜 군중들에 총탄을 퍼붓고 총검을 휘둘렀다. 일제의 무자비한 무력 진압으로 시위군중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승하자= 지금의 남사예담촌인 단성면 사월리는 곽종석이 태어난 곳으로 지난 2013년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됐고, 2018년 ‘파리장서 기념탑’도 세워졌다. 기념관 건물 왼편에 1920년 곽종석의 제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지은 ‘이동서당’이 있다. 산청군은 이 일원을 오는 2020년까지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 테마공원’으로 조성한다.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에 위치한 유림독립운동기념관과 면우 곽종석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이동서당(왼쪽 위)./김승권 기자/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에 위치한 유림독립운동기념관과 면우 곽종석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이동서당(왼쪽 위)./김승권 기자/
산청군 단성면 성내리에 있는 항일독립유공자 추모비.
산청군 단성면 성내리에 있는 항일독립유공자 추모비.

곽종석 생가를 복원하고 독립운동 체험시설과 테마공원 등을 조성해 독립운동 성지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또 단성면 성내리에 산청·단성·신등·신안 등지에서 봉기한 수천 군중과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와 무명의 애국선열을 기리기 위해 1995년 군민의 이름으로 세워진 항일독립유공자 추모비가 있고, 읍내 독립운동 결사대의 비밀회합 장소였던 수계정이 산청공원 내 변함없이 자리해 있다.

2008~2010년 지역 항일운동 자료를 수집해 산청항일운동사를 발간한 추경화 향토사학자는 “우리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항일독립운동 선열을 발굴해 명예회복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독립운동사 전반을 더 또렷이 계승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재경 기자 j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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