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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소설의 발자취를 따라- 조화진(소설가)

기사입력 : 2020-06-11 19:54:54
조화진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은 약혼녀가 있는 부자 남자와 가난한 처녀의 러브스토리다.

한 사람만을 열렬히 사랑하며 일생을 보내기란 쉽지 않을 터인데, 소설 속 남자는 열렬하고 순정하게 일생을 한 여자에게 올인한다. ‘적어도 사랑이란 이런 거야’를 보여주는 모델 같은 러브스토리로도 읽힌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작품 중 최애하는 작품이 뭐냐고 물으니 ‘순수박물관’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는데, 그의 자유로운 사상, 연애, 탐미에 감탄한 대목이다.

지난가을 시칠리아 여행길에 이스탄불에서 며칠 머물게 되었다. 숙소와 가까워서가 아니라도 꼭 가보고 싶어서 작가 자신이 직접 세운 순수박물관 뮤지엄에 갔다.

작가가 자비로 지은 3층짜리 붉은 건물은 미로 같은 골목 깊숙이 있었다. 소설 속 여주인공의 집터이기도 하다. 작가의 진한 애정처럼 건물도 붉은 색이었다.

뮤지엄 안에 들어서자마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소설 속 남자와 여자가 생애에 피우고 만지고 걸치고 쓰고 소비한 생활의 모든 물건이 전시되어 있었다.

심지어 침실까지도 제작해 놓았고, 여주인공의 몸에 걸친 장신구도 어머 어마하게 많았다. 물론 작가가 오랜 세월에 걸쳐 모은 물건들이다. 상상을 넘어설 만큼 많은 양과 디테일한 품목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소설의 발자취를 따라 하나하나 둘러보니 감탄을 넘어 경탄스러울 지경이었다.

물건에는 한 남자의 추억과 순애보와 절대사모가 들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감탄인데, 그의 열정과 사랑관이 짐작도 안 될 정도로 커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가 얼마나 사랑을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작가가 셀프 최애작품이라고 꼽는 것은 당연했을 터다.

연인을 기억하기 위해 박물관을 지어 연인의 물건을 모아 추억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집착이라는 생각을 하며 박물관을 나왔다. 또 소설이므로 가능하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하면서도, 상상을 현실로 옮긴 작가가 대단해 보였다.

오래전 ‘순수박물관’을 읽으면서 그토록 아름다운 한 남자의 순정에 전율을 느꼈다. 갈구하면서도 쉽게 사랑을 버리고, 바꾸는 세태인 즈음,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사랑법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 한 여자를, 한 남자를, 상대를, 간절히 사랑하고 있을 것이므로.

채널이 많아서인지 틀면 나오는 TV 속 그 많은 멜로드라마에는 얽히고설킨 남녀관계에 배신, 복수, 집착, 폭력이 난무하고 입에 올리기도 거북스런 남녀 간 치정물이 넘쳐난다. 소위 막장 드라마라 불리는 것을 재미로 보고 욕하면서 본다지만 다른 한편, 이 시대의 사랑법이 저렇거니 여겨지는 게 슬픈 현실이다.

문학작품 속 사랑은 현실과 거리가 있으니 소설 속에서라도 위안을 얻는 기쁨은 크다. 소설을 읽으면서 또 영화를 보면서 감정을 몰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화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