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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정기(경남대 명예교수)

기사입력 : 2020-08-11 20:11:09

정부가 ‘8·4 부동산대책’을 통해 일부 지역에 공공 임대주택을 대규모로 건설하겠다고 발표하자, 해당 지역의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이 공개적으로 반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정부에 힘을 실어줘도 모자랄 정치인과 단체장의 엇박자 움직임이 정부 정책을 향한 야권과 여론 일각의 비판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되기도 했지만, 여기서는 이런 정치적 측면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책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으나 자기 지역에서는 안 된다는 이른바 님비현상에 잠시 주목해보려 한다. 그들이 내세운 그럴듯한 반대 명분에도 불구하고, 그 저변에는 이기주의적 발상과 함께 공공 임대주택의 주된 입주자인 주거취약 계층에 대한 차별 내지 배제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듦을 곱씹어보려는 것이다.

이 일을 두고 해당 정치인과 지자체장을 힐난하는 논평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들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이 의식할 수밖에 없었을 지역 주민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손가락질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문제가 특정한 인사나 지역에 국한된 것이라 볼 수 없겠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침착해 있을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의식이 고스란히 반영된 우리 모두의 부끄러운 자화상일 뿐이라는 얘기다. 달라져야 한다.

임대주택 거주자 자녀들과 자기 자녀들을 같은 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집단으로 민원을 제기한 어떤 아파트 입주민들의 행동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어른들의 비뚤어진 의식이 아이들에까지 영향을 주어, 그들 입에서 ‘엘사’니 ‘휴거’니 하는 은어들이 회자되기에 이른 것이 아닐까 싶다.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엘사’는 LH공사가 공급한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을 비하하는 말이며, ‘휴거’는 ‘휴먼시아 아파트에 사는 거지’란 뜻이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제 의식이 세습되고 재생산되는 딱한 우리 현실을 보여준다. 안타까워만 하면서 방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거주할 만한 공간을 갖추고 향유하는 일은 모든 사람의 보편적 욕구의 범주에 든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이것을 헌법상의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여 주거취약 계층을 위한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하는 일은 마땅한 책무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점에서 이 문제를 다룰 정책 추진을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채택하여 주택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계층 간의 주거격차를 줄여 취약집단의 주거복지를 확대시키고자 하는 현 정부의 정책지향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의도한 바와 다르게 오히려 역효과가 거듭되는 현실을 두고 일각에서는 차라리 가만히 시장에 맡겨두는 편이 옳았다고 목청을 높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줄잡아 일곱 가지 정도로 분류되는 우리나라 공공 임대주택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며 수요에 비해 태부족인 것은 사실이나,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불분명하다. 한 정치인은 2017년 기준으로 136만6000호라는 국토부의 추계가 과장되었으며, 실제로는 약 86만7000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공공 임대주택 정책은 이와 같은 공급량 문제도 명확히 하여 수요에 적절히 대처할 필요가 있지만, 주거의 질 문제에도 소홀할 수 없다.

공공 임대주택에 장기 거주하는 것과 정신건강 사이의 부적 관계를 밝힌 연구결과들은 주거의 질, 주변 환경, 사회의 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거주인의 자기 인식에 영향을 끼침을 시사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주거취약 계층에 대한 사회적 배제 의식을 불식시키는 일이 공공 임대주택의 질과 환경에 대한 관심과 개입을 보다 강화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이미 다양한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정책결정권자들의 의식과 의지 및 역량에 달렸다.

감정기(경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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