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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이 가을에 나는- 석영철(경남민생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 2020-10-14 20:33:55

이 가을에 나는 공주며 장성이며 창녕이며 진주며 며칠을 허둥대며 다녔다. 그것이 일이 되든, 돈이 되든, 또는 아무것도 안 되든 별로 부담이 없었다. 그저 이번만큼은 찬바람 쐬며 다니는 그 자체가 좋았을 뿐이다. 이 나이에 애꿎은 가을바람이 들었을까?

문득, 저 멀리 추수가 갓 끝난 논밭을 바라보며, 김남주 님의 시가 생각난다. 수백 번도 넘게 듣고 또 들어 낯익은 그의 육성 시, ‘이 가을에 나는’을 몇 번씩이나 들어본다.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먹고….”

이 가을에 그가 새로운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던 그 길도 내가 다닌 이 길처럼 그랬을 것이다.

이 가을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가을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두가 코로나로 인해 빼앗긴 자유를 찾지 못해 심성마저 옥죄어지고, 사람 간의 거리마저 멀리 두기를 수없이 반복한 지금. 생활의 전선에서, 노동자들이, 많은 사람이 고통과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지금. 수십 년을 금지옥엽처럼 가꿔온 자신의 자산들을 한순간에 놔버려야 하는 절망에 가득한 사람들. 그리고 이제는 그조차도 ‘당연한 일상’으로 묶여 있는 지금. 나도 그 한 부분이다.

비록 김남주 시인처럼,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은 아닐지라도, 보이지 않는 코로나 속 저마다의 감옥에 나 또한 놓여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이 며칠간의 가을 여행들이 그것을 새삼 느끼게 해줬다.

그래서 이 가을에 나는, 더 늦지 않게 뭐라도 갈무리를 해야겠다. 김남주 님의 시처럼 ‘가다가 숨이 차면 아픈 다리 쉬었다 가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추수를 하는 농부의 마음 같은 풍족함은 없을지라도, 추운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마음의 추수를 해야겠다. 그것이 보잘것없어도 지금 이 가을에 갈무리하지 않으면 아마도 만만치 않은 겨울을 보낼 것이다.

이 가을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행복한 사람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따뜻한 커피한잔을 들고 있는 나는 그나마 행복한 사람이다. 그래서 코로나로 지친 이들에게 나의 손이 빈손일지라도 손을 내밀어 온기라도 건네주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그렇다.

석영철(경남민생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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