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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박○순 신○순 박○경- 허철호(문화체육부장·부국장)

기사입력 : 2020-10-21 20:08:40

‘집에서 얌전히 학교나 다니다 시집이나 가길 바랐던 아버지는 집 떠나 마산으로 간다니 “퍽이나 주경야독하겠다. 못 참고 오려거든 집에 오지도 말고 섬진강 물에 코 박고 죽어라”고 악담을 퍼부으셨다. 가는 내내 나는 아버지의 모진 말이 떠올라 창밖을 보고 눈물만 흘렸다. 학교에 도착하니 일명 ‘팔도잔디’라 불리는 운동장이 보였다. 개교 당시 전국에서 모인 4천여 명의 학생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잔디를 옮겨 심었다고 들었다. 3년 동안 낮엔 여직공으로 밤엔 학생으로 살았다. 힘들게 야간학교를 다녔지만 수업을 들으며 졸업장을 딸 수 있다는 생각에 참고 견뎠다.’

얼마 전 마산자유무역지역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열린 1970~80년대 전국 여성 노동자들의 수기 공모전 수상작인 ‘교문을 들어선 소녀’라는 작품 중의 일부다.

수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부산 합성섬유 공장 이야기인 ‘감추고 싶은 기억은 보람과 긍지의 날이었다’를 비롯해, 서울 구로공단 잠바공장 이야기인 ‘그때 그 시절 순이들’, 마산수출자유지역 이야기 ‘밥 잘 사주는 예쁜 언니’, 서울의 버스 안내양 이야기 ‘155번 버스, 그 휴전선에서’ 등 수상작 13편에는 당시 힘들고 고달팠던 여성 노동자들의 삶이 담겨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신이 일을 해 가족들의 생활비와 학비를 대던 여성 노동자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고, 들었던 이야기라 공감이 갔다. 수상작 중 동문회에 다녀온 후 소감을 적은 ‘너도, 나도, 누구의 딸, 누구의 언니, 누나로서, 그리고 누구의 엄마로서, 참 수고 많았다’는 부분을 읽고는 내 마음이 흐뭇했다.

그러나 수기집에는 수상자들의 이름이 박○순, 신○순, 박○경으로 중간 글자가 공개되지 않았다. 공모전 행사 관계자에게 수상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유를 물었더니 본인들이 공개를 꺼려 해서 그런 거라는 답변을 들었다.

오래전 전국언론노동조합 행사에서 한 여성 강사가 거북선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는 답을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여러분’이라고 말했다.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혼자 만든 게 아니고 수많은 여러분이 함께 만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한 김진숙 강사는 이후 자신의 경험 등을 담은 ‘소금꽃나무’를 책을 냈는데, 책에는 돈을 벌어 대학 가는 소원을 풀려고 시골에서 도시로 나온 소녀가 겪은 20여년간의 고민과 아픔이 담겨 있었다.

‘한진중공업 다닐 때 아침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책 표지에 적힌 글을 읽고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었다. 책을 읽은 후 내가 그동안 봐왔던 수많은 소금꽃나무가 바로 나요, 내 가족이요, 이웃집 형, 누나이고, 동생이란 생각을 했었다.

이런 점에서 수기를 쓴 여성 노동자들이 소금꽃나무였고 거북선을 만든 ‘여러분’이었다. 이들의 땀과 희생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다.

한분 한분 자랑스러운 여러분들이 앞으로는 어떤 자리에서도 당당하게 이름을 밝혔으면 좋겠다. 늦었지만 수상한 여러분과 그들과 함께 일했던 모든 여러분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허철호(문화체육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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