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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41주년 기념 시민강좌] 암울했던 유신정권 종식시킨 역사적 가치 재조명

박철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장

“1970년대 반독재 정권에 치명적 타격

기사입력 : 2020-11-05 21:19:23

암울했던 유신정권을 종식시킨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시민들의 항쟁 정신 계승을 돕기 위한 시민 강좌가 5일 오후 4시 경남신문 다목적홀에서 열렸다. 이날 강좌에서는 박철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장과 김문주 영남대 국문과 교수가 각각 ‘한국 민주화 운동과 부마항쟁’·‘부마민주항쟁과 문학의 민주주의’를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경남신문이 주관, 창원시가 후원한 이날 강좌는 부마민주항쟁의 성격과 특징, 역사적 의의 뿐만 아니라 1970~1980년 마산을 중심으로 개진됐던 지역 ‘문화 운동’의 흐름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경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경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한국 민주화 운동과 부마항쟁= 박철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장은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학생운동이나 소수 명망가들에 국한돼 있던 19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 운동보다도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으며, 그로써 답보상태에 있던 1970년대 학생 및 재야 중심의 민주화 운동의 한계를 뛰어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박 관장은 부마민주항쟁의 발생 계기로 △역사적 전통 △항쟁의 발생배경과 지역적 조건 등을 꼽았다. 박 관장은 “경남·부산은 최초의 개항장으로 일찍이 일본 식민지 침략의 발판이었다. 경남·부산에 대한 일본인들의 통제와 탄압은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교활하고 악랄했다”면서 “이에 1920년대부터 경남·부산에서는 청년운동과 부두 노동자들의 항쟁 등 다양한 형태의 민족해방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됐으며, 이 시기부터 민중운동의 치열성과 다양성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박철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관장이 5일 오후 경남신문사 1층 홀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41주년 기념 시민강좌에서 '한국민주화운동과 부마항쟁'이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박철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관장이 5일 오후 경남신문사 1층 홀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41주년 기념 시민강좌에서 '한국민주화운동과 부마항쟁'이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이어 박 관장은 “부마민주항쟁의 발생배경은 근본적으로 유신 독재권력의 광범위하고 극단적인 억압구조 그 자체였다.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 아래 쌓인 민중의 불만과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며 “특히 마산·부산은 김영삼의 정치적 지지기반이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김영삼에 대한 반동적 탄압을 촉매로 시민들의 불만이 터진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당시 실업률이 높았던 마산과 부산 지역의 경제상황도 계기가 됐다”라고 전했다.

박 관장은 “부마민주항쟁은 인권보장 및 정치제도의 합리성에 치중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가치목표가 주도적으로 반영됐으며, 뚜렷한 조직적 지도부가 없는 민중적 주체에 의한 시위였다”면서 “당시 투쟁양상을 살펴보면 집회 및 시위를 기본으로 경찰기관이나 관공서, 어용언론기관 등에 대한 파괴·방화·투석·화염병 투척 등 진압경찰의 폭력에 대한 자구적 대응이 상당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부마항쟁은 유신말기 반독재 항쟁의 거대한 중심으로 솟아오르면서 정권 내 권력 암투를 급속히 자극해 10·26사태가 일어나는 등 유신정권 붕괴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서슬퍼런 긴급조치시대의 숨 막히는 억압구조를 뚫고 4월 혁명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민중항쟁의 지평을 다시 열었다”며 “부마민주항쟁은 ‘억압이 있으면 저항이 있다’는 우리 항쟁의 전통을 계승하고, 나아가 독재정권은 반드시 붕괴한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준 데 의의가 있다”고 했다.

박 관장은 부마민주항쟁의 발생 배경과 역사적 의의 등을 설명하면서도 △미완의 항쟁 △확고한 지도부의 부재 등을 부마민주항쟁의 한계로 짚었다. 그는 “부마민주항쟁이 유신정권 붕괴의 계기로 작용하긴 했으나, 결국 정권 내부 암투에 의한 김재규의 저격이라는 힘을 빌렸다. 그 결과 유신정권의 형식적 붕괴만 가져왔을 뿐 유신독재의 망령·강경군부 독재에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며 “또한 항쟁의 확고한 지도중심이 없었다는 점에서 부마민주항쟁이 전국적 차원의 광범위한 반독재 항쟁으로 즉각 확산되지 못하고 지역 차원으로 국한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박 관장은 이날 부마민주항쟁을 설명하기에 앞서 8·15 해방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전개과정을 함께 살피면서 “시대적 갈등이 매개 지역에 관철됨으로써 발현되는 구체적 모순에 대해 지역운동은 전국적 연대의 관점을 명확히 틀어쥐고 수행될 때만이 해당 사회의 보편적 과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교훈을 전했다.

마산 파출소 피습현장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마산 파출소 피습현장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마산에 붙은 격문./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마산에 붙은 격문./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부마민주항쟁과 문학의 민주주의= 김문주 영남대 교수는 “지역에서 발간한 최초의 무크지 ‘마산문화’와 그 전신 격인 ‘남도’ 등 1970년대 중반부터의 지역 문화운동이 있었기에 침체해 있던 마산의 의식이 각성하고, 지역사회의 운동 역량이 조성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무크지란 단행본과 잡지의 특성을 아우른 부정기 간행물이다.

김 교수는 “이번 강의에서 ‘마산문화’에 주목한 이유도 1970년대 중반부터 개진돼 1980년대에 이르러 본격화된 문화변동의 양상과 문화운동의 성과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무크지로 수렴된 이 시기의 시대정신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매우 귀한 사례이기 때문”이라며 “‘마산문화’는 지역에서 발행된 최초의 무크지로, 당대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문화 운동의 실천들을 수렴하고 매개하는 구체적 역할을 했다”고 운을 뗐다.

김문주 영남대 국문과 교수가 5일 오후 경남신문사 1층 홀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41주년 기념 시민강좌에서 '부마민주항쟁과 문학의 민주주의' 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문주 영남대 국문과 교수가 5일 오후 경남신문사 1층 홀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41주년 기념 시민강좌에서 '부마민주항쟁과 문학의 민주주의' 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 교수는 “‘마산문화’의 첫 출발은 ‘재경마산학우회’였다. 재경마산학우회는 1965년 경남도청 유치의 건을 계기로 발족했으며, 발족 초기에는 음악회·미술전·시화전·초청강연회 등의 친목활동과 지역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대학설명회 등의 일반적인 활동을 했다”면서 “하지만 1970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이후 긴급조치 발동으로 집단행동이 불법화 된 것을 계기로 재경마산학우회보 ‘남도’를 창간, 마산에서 초청학술강연회와 학술발표의 장을 가지면서 지역의 의식을 깨우는 작업을 본격화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남도’를 창간한 재경마산학우회는 소모임을 통해 서울과 지역의 연계고리를 구축함으로써 지역의 운동 기반을 조성하고 이후 지역사회에서 개진되는 다양한 문화운동의 밑거름을 마련, 1980년을 전후로 펼쳐진 마산 지역의 문화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가능케 한 중요한 동력이었다. 또한 재경마산학우회는 1976년 경남대 후배들을 참여시키면서 경남대 첫 이념서클 ‘사회과학연구회’를 결성, 이들이 10·18 마산 민주항쟁 등 지역의 시민사회 운동 역량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맡게 된다.

김 교수는 “1982년 12월 창간된 ‘마산문화’는 갇힌 문화·문학에 대한 타개를 선언했는데, 문화의 서울집중을 반대하고 ‘지역문화’ 건설을 한목소리로 주장했다”면서 “간행물이 갖는 어떤 정념을 담아내는 단순한 그릇으로서의 도구적 기능을 넘어 현실과 생산적으로 교호하는 변증법적 발전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현실 변혁에 역동적으로 기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마산문화’가 지역문화의 현재에 대한 조명, 지역의 역사에 대한 고찰을 넘어 노동·농민 운동 현장의 소식까지 담으면서 경남이라는 지역 속에서 현장과 지식인을 구체적으로 매개하기 위한 실천적 모색의 장으로서 그 역할을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지역적 정체성과 자부심이 각별했던 마산을 중심으로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중반까지 개진된 지역 문화 운동의 전체적 흐름과 구체를 살펴봤을 때 ‘뜻밖에’ 도래한 것처럼 보이는 무크지 시대가 당대 변혁 운동의 한 산물이었으며, 이후 지역에서 전개된 다양한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면서 “재경마산학우회보 ‘남도’에서 ‘마산문화’에 이르는 마산의 변혁운동 과정은 당대의 폭압적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중앙-지역, 이론-현장, 지식-실천, 지식인-민중이 상호침투함으로써 운동의 역량과 성격을 생산적으로 확대해간 중요한 사례”라고 전했다.

이한얼 기자 leeh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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