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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나는 대학파 서예가다- 윤영미(서예가)

기사입력 : 2021-01-17 20:07:16

1990년대 원광대를 시작으로 대학에 서예과(書藝科)가 신설되기 시작했다. 계명대 서예과에서의 공부는 내 인생 최고 선택이었다고 회상한다. 전국에서 모여든 서른 명의 동기들이 정예부대처럼 한자서예와 한글서예, 문인화, 전각(篆刻), 현대서예와 서예이론, 서예사(書藝史) 그리고 당시 막 수교(修交)된 중국대륙에서의 꿈도 함께 꾸게 되었다. 대한민국 최고 선생들을 모시고 뜨거웠던 대학생활을 보냈다.

졸업을 하고 우리는 전국으로 흩어졌고, 기존 아성을 뚫어내며 참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다. 선생의 글씨를 따라 쓰던 기존 세대에 반해, 비문(碑文)을 연구하며 쓰는 대학파 청년서예가들은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를 숨기며 서력(書歷)만큼 우리는 점점 필력(筆歷)이 늘어갔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대학에서 서예가를 양성하는 교수가 되어 있고, 정부기관에서 임명장을 쓰는 공무원이 되기도 했다. 협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비문탁본으로 서예사를 연구하기도 하며, 서예문헌을 연구하는 기관에 있기도 하다. 거상(巨商)이 되어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문방사우를 수입하기도 한다. 유학하다 그곳에 정착하여 서예로 국위를 선양하기도 한다. 전문 서예잡지를 만들기도 하고, 방송국에서 글씨예술을 화면에 디자인하기도 한다. 오직 붓만으로 전문 서예가의 길을 걷는 동문도 있다.

작년 가을, 몇몇이 모여 모교에서 작품을 펼쳐 보게 되었다. 시작은 같았지만 각자의 세월을 견디고 돌아보니, 우리는 서로 다른 결을 만들며 살아내고 있었고 서로가 대견스러웠다.

아날로그식의 서예가 최첨단시대에 살아남으려면 현실과의 타협이 필요했다. 이것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최적화로 연마된 대학파 서예가의 역할이었다. 그들에 의해 서예가 일상으로 나오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젊고 서예도 젊어지고 있다. 대학파 서예가들이 사회에 뿌리를 내렸고 닻을 올려 항해가 시작되었다. 취업에 밀려 서예과가 점점 폐과되어 가고 있는 현실은 아쉬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파 서예가! 오래토록 젊을 수 있는 각인된 나의 고유명사가 되어 있었다.

윤영미(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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