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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⑥ 이병철의 두 번째 사업, 운수업

[1부] 또 하나의 가족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⑥ 이병철의 두 번째 사업, 운수업

정미소 자리잡자 화물차 20대 인수해 운송업 손댔지만…

기사입력 : 2021-08-06 07:39:27

1899년 개항된 마산항은 물자의 교역은 많았지만 경남을 비롯 전국으로 배송되는 운송수단은 충분하지 못했다. 화물 운송에 많이 쓰이는 트럭의 경우 그 운임이 매우 비쌌다. 이병철은 정미소 사업의 쌀을 운송하는 것 외에 독립된 운송업을 추진하는 것도 좋은 사업 아이템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정미소 사업이 안정적으로 정착되자 이병철은 다음 사업으로 정미소의 쌀을 운반할 수 있는 운송회사를 생각한 것이었다. 훗날 무역업이 잘 되자 직접 제조하는 제당사업을 검토했고, 실행했다. 이병철은 이러한 창업형 성장을 통해 시대에 필요한 제품을 생산, 개발하거나 몇 년 후를 예측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이병철이 거래했던 식산은행 마산지점(전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의 옛 모습./김형윤의 마산야화 캡처/
이병철이 거래했던 식산은행 마산지점(전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의 옛 모습./김형윤의 마산야화 캡처/

이병철은 본격적으로 운수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일본인이 경영하던 일출자동차의 화물차 20대를 인수했다. 이때가 1936년 8월이었다. 당시의 화물자동차 한 대의 값은 엄청난 고가였다. 두 번째 사업인 운수사업은 자체에서 생산한 정미소의 쌀 운송지원 업무 외에도 마산항이 물자 집산지로 화역 물품이 많아 운수업은 조기에 정착했다. 트럭을 통한 운송사업에서 적지 않은 현금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이병철이 경영하는 정미소와 자동차사업장에는 특이한 경영방식이 도입됐다. 50여 명의 직원이 무질서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구체적으로 개개인이 해야 할 업무분담을 세분화했다. A직원은 도정이 끝난 쌀 무게만 달게 하고, B직원은 사무실에서 물건이 나가고 돈이 들어오는 전표업무만 전담하게 했다. C직원은 무게 측정이 끝난 쌀 가마니 포장과 반출 업무만 보게하는 등 분업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숙련과 전문성을 가지도록 함과 동시에 스스로 책임지게 하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이러한 분업시스템 제도는 훗날 삼성그룹의 경영시스템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화물자동차가 도입된 것은 1926년이다. 마산은 1930년 이후로 보고 있다. 이 시기 마산 남성동에 영업소를 차리고 마루낑, 마루이찌 등 일본인이 운영하는 운송회사는 총 36대의 화물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1939년부터 일본 정부는 트럭의 경우 유사시 전시동원령에 대비, 차출이 쉽게 되도록 합병해 1개만 운영하도록 지시했다. 뿐만 아니라 휘발유도 배급제로 실시했다. 중·일전쟁 등 계속된 일본의 전쟁 참여로 1940년부터는 눈물만큼 주던 휘발유 배급도 중단시켜버리자 나무를 태워 운행하는 목탄차가 나오게 됐다. LG그룹 구인회가 실패한 사업 중 하나도 목탄차 사업이었다.

1947년 3월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에서 발행한 통장양식 사본. 1930년대 이병철이 식산은행과 거래했을 당시에도 이 통장 양식이 사용됐다./독자 김진경씨 제공/
1947년 3월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에서 발행한 통장양식 사본. 1930년대 이병철이 식산은행과 거래했을 당시에도 이 통장 양식이 사용됐다./독자 김진경씨 제공/

1947년 3월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에서 발행한 통장양식 사본. 1930년대 이병철이 식산은행과 거래했을 당시에도 이 통장 양식이 사용됐다./독자 김진경씨 제공/

1947년 3월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에서 발행한 통장양식 사본. 1930년대 이병철이 식산은행과 거래했을 당시에도 이 통장 양식이 사용됐다./독자 김진경씨 제공/

1947년 3월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에서 발행한 통장양식 사본. 1930년대 이병철이 식산은행과 거래했을 당시에도 이 통장 양식이 사용됐다./독자 김진경씨 제공/

# 세 번째 사업, 경남부동산 경영

정미소 사업과 자동차 운송사업으로 충분한 자금을 확보한 이병철은 세 번째 사업으로 토지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이 시기가 1936년 9월이다. 자동차사업과 동시에 시행한 사업이다.

정미소 사업과 쌀 거래 등을 통해 땅값의 동향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스레 토지가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논 한 평이 25전으로 한 마지기 200평이 50원 하던 때였다. 김해평야를 비롯 경남 일대 토지를 매입해 1937년 6월에는 연 수확 1만석이 가능한 약 200만평의 논을 소유하게 됐다. 호사다마랄까. 1937년 7월, 일본의 중국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확대되면서 일본 정부는 비상조치로 모든 은행 대출을 중단했다.

이렇게 되자 토지 구입하기도 힘들어지고 전쟁으로 인한 어수선한 분위기 등으로 토지 시세가 하루가 다르게 폭락하는 일대 혼란이 발생했다. 이병철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사들인 전답을 다시 팔아야 하는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된다. 1937년 9월, 마침내 이병철은 시가보다 싸게 전답을 처리하고 자본 확보를 위해 협동정미소와 일출자동차운수회사까지 청산했다. 그야말로 1년의 짧은 기간에 천당과 지옥을 체험한 것이다.

이병철은 “3가지 이익이 있으면 반드시 3가지 해로움도 있다” “교만한 자 치고 망하지 않은 자 아직 없다” 서당에서 배웠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실패가 훗날 사업경영에 다시 없는 교훈이 되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정미소 사업과 운수업을 정리하고 이병철은 수개월 동안 상업이 발달한 북경, 장춘, 상해, 청도 등 중국 대륙을 견학했다. 중국 상인의 거래액, 거래품목, 거래방법을 알고 또 한 번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그 대상지를 선택했는데, 이것이 최초로 삼성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대구 삼성상회이다.

# 중국을 보고, 세상 넓은 것을 알다

이병철, 구인회, 조홍제 세 사람은 어릴 때부터 서당에 다녀 한자 교육, 유교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러 자료를 분석해 본 결과 집안의 재산은 조홍제, 이병철, 구인회 순으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처음부터 많은 자본을 투입해 큰 공장을 세우고 제조업을 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제한된 금액을 받아 어렵고 힘들게 사업을 펼쳐 성장해 나갔다. 창업자금이 부족하자 이병철의 정미소는 지인과, 구인회의 포목점은 동생과 함께 사업 밑천을 만들었다.

이병철은 중국 견학을 하고 귀국 후 대구로 가서 제분업과 무역업을 시작했다. 구인회는 첫 사업인 포목점 외 어채(고기와 청과), 그리고 운송회사를 경영하면서 더 큰 사업을 위해 중국을 견학하고 견문을 넓혔다. 귀국한 후 부산에서 동동구리무라는 화장품을 사업 주요품목으로 했다. 조홍제 역시 일본 법정대학 졸업 후 비료 관련 사업을 첫 사업 품목으로 결정하고 일본 전역에 시장조사를 추진하다가 장남의 건강 악화로 급히 귀국한다. 귀국 후 고향 함안 군북에서 정미소 도정 일과 가마니 짜기 등의 관련 사업을 하다 해방 후 마산에서 철가공사업을 시작했다.

# 관광스토리빌딩 경남 1호

이병철은 마산에서 정미소를, 구인회는 진주에서 포목점을, 조홍제는 마산에서 철가공업을 했다. 세 분의 고향이 의령과 진주, 함안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세계적인 기업을 만든 창업주의 고향과 첫 사업 시작지는 모두 경남이다. 기업가의 경제유산이 풍부한 경남을 관광스토리빌딩(대중에게 흥미와 관심을 제공하고, 교훈적이면서, 구전이 아닌 사실적 이야기에 흔적과 현장이 있는 명소) 1호로 지정해 중국, 일본을 비롯 세계 관광시장에 출시해도 제 몫을 충분히 할 것 같다.

<이병철의 한마디>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추어야 한다.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고 판단이 서면 깨끗이 미련을 청산하고 차선의 길을 선택하라.

이 래 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이래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이래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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