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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⑦ 대구 삼성상회 설립, 무역과 국수판매

또 하나의 가족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⑦ 대구 삼성상회 설립, 무역과 국수판매

중국 다녀온 스물여덟 청년, 대구에 ‘삼성상회’ 세우다

기사입력 : 2021-08-12 21:53:57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뜬금없이 왜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 이야기에 연암 박지원을 등장시켰을까? 이병철과 LG그룹 창업주 구인회의 창업과정을 깊게 분석해보면 묘하게도 연결고리가 있었다. 참고로 연암 박지원의 호는 연암(燕巖)이며 구인회 회장의 호는 연암(蓮庵)이다. 창업주 세 사람의 호에 대한 작명 배경과 의미는 다음 기회에 지면을 빌려 소개하고자 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정조 1780년, 청나라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 온 경험을 토대로 기록한 책이다. 열하일기의 주요 수록내용은 청나라의 정치·경제·천문·지리·문학·농업·수리 등 각 방면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북경을 비롯 조선까지 이어지는 승덕, 산해원 등의 마을풍경과 주민의 생활, 농사짓는 모습을 보고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박지원은 “1780년대 중국에는 3리만 가면 성을 쌓고 5리만 가면 곽을 쌓는다”는 표현처럼 중국의 문화는 조선을 앞서 있었다. 실제로 현지에서 보고 배운 것이 많다고 했다. 함양군의 상징에는 지리산과 해, 맑은 물이 떨어지는 물레방아가 결합된 형태이다. 박지원이 안의(현 함양군)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중국에서 본 물레방아의 용도를 알고 설치한 역사적 근거를 인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병철과 구인회가 견문한 1930년대 중국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들어오면서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짐작건대 구인회와 이병철은 당시 지식인의 필독서 중 한 권인 열하일기 등을 통해서도 중국을 알았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이지만 1934년 중국까지 철도 노선도 개설되어 있어 중국 왕래도 가능했다. 그래서인지 자본과 물품이 모이는 큰 시장인 중국의 대도시를 답사 대상 지역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열하일기 속에 등장하는 중국으로 가는 관문 ‘천하제일관’. 이곳에서 입국 승인을 받아야만 북경으로 갈 수 있었다./이래호/
열하일기 속에 등장하는 중국으로 가는 관문 ‘천하제일관’. 이곳에서 입국 승인을 받아야만 북경으로 갈 수 있었다./이래호/

이병철도 새로운 사업을 하기 전에 먼저 답사지로 선택한 곳이 박지원이 다녔던 중국 심천, 장춘, 북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조차 지역인 상해와 독일 조차 지역으로 유럽문화가 들어온 청도 등의 대도시도 견학을 하고 왔다.

이병철은 중국을 견학한 후 “이곳 중국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았고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규모의 사업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소회했다.

# 삼성이라는 이름의 탄생

1937년 10월부터 1938년 1월까지 이병철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 여행을 다녔다. 서울과 평양, 신의주, 부산, 원산, 흥남을 비롯해 멀리 중국 심천과 장춘, 북경, 상해, 청도 등 중국 대도시를 약 3개월간 견학했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업 아이템을 찾기 위한 대도시 현지답사이다.

그가 본 중국 시장의 규모는 엄청나게 컸다. 조선의 시장에서는 고작 몇 천원 혹은 몇 만원 단위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비해 그곳에서는 수십, 수백만 원이 오갔다. 조선의 시장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병철은 실제로 현장에서 본 중국 상인의 상거래 규모에 놀라고, 소비능력을 갖춘 수요자가 많은 것에 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일전쟁과 서구 열강이 중국의 도시들을 조차 지역으로 하는 등 정치적으로 어수선하지만 중국은 오랜 전통과 역사가 축적된 경제, 문화대국이었다.

중국에서 취급하는 품목은 물론 중국의 사업방식도 배울 것이 많았다.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이 중국을 대상으로 큰 무역업을 한 것도 알고 있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이병철이 중국 시장을 견학하면서 느낀 내용이다.

“만주지역 심천이나 장춘 등은 내륙 깊은 곳으로 겨울 추위가 심한 지역이다. 이런 곳에서는 과일이나 생선의 구입이 쉽지 않다. 청과물, 건어물, 잡화 등의 품목은 일상생활에 필수품이라 반드시 필요할 것이며 소비도 꾸준하게 늘어날 것이다. 상호 부족 물품을 공급한다. 그렇다. 무역업이다”.

무역을 하기로 이병철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중국 시장에서 감히 상상도 못할 규모의 사업이 존재하는 것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런 배경으로 이병철이 무역업과 제조업을 주력으로 하는 ‘삼성상회’가 대구에 마침내 설립됐다.

대구 삼성상회 설립 초기의 모습. 1938년 설립 당시에는 ‘삼성상회’였으나 1941년 다양한 물품을 취급하기 위해 ‘주식회사 삼성상회’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중앙 타원형안의 글자는 한자 ‘제분 제면’으로, 국수가 당시 주력사업 품목임을 추측할 수 있다./호암재단/
대구 삼성상회 설립 초기의 모습. 1938년 설립 당시에는 ‘삼성상회’였으나 1941년 다양한 물품을 취급하기 위해 ‘주식회사 삼성상회’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중앙 타원형안의 글자는 한자 ‘제분 제면’으로, 국수가 당시 주력사업 품목임을 추측할 수 있다./호암재단/

# 대구명물이 된 삼성상회 별표국수

1938년 3월 1일, 이병철의 나이 28세이다.

이병철은 삼성상회 설립에 앞서 마산에서 정미소, 운송업 등 몇가지 사업을 했지만 삼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대구 ‘삼성상회’가 최초이다.

자본금은 3만원이고 규모는 200~250평 정도 된다. 초기 업무를 시작할 때 종업원은 40여명이었다. 거대한 삼성그룹을 만드는 씨앗이 탄생한 날이다.

바로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체이다. 1939년 조선양조를 인수한 후에는 사세 확장과 다양한 물품을 취급하기 위해 1941년 ‘주식회사 삼성상회’로 상호를 바꾸었다.

마산 협동정미소와 마산일출자동차회사의 운영 경험을 토대로 시장의 변화를 예측하면서 청과물과 건어물의 작황과 어획량 등에 대해 끊임없이 조사하여 무역을 해 나가자 안정적인 매출로 회사는 꾸준한 성장을 했다. 단시간에 안정적인 회사로 자리잡고 고속성장을 했다.

무역품목은 대구 근처의 농촌에서 사과 등의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을 수집해서 만주와 북경지역에 팔았다. 이병철은 단순하게 중개역할을 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무역업으로는 성장의 한계가 있음을 알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제조업도 병행했다. 사업품목으로 제분업과 제면업을 했다.

‘별표국수’를 생산 판매하였는데 그 인기는 아주 높았다. 공장안에 세워진 제분기와 제면기는 쉬는 날 없이 가동되었다. 국수공장 안에 가건물 방을 넣어 집에 오고 가는 시간도 아낄 정도였고, 이건희가 태어나자 의령 본가에 맡길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가동되는 만큼 회사의 수익도 늘어났다.

이병철이 생산한 국수 상표이다. 좌측 한자는 美味優良(미미우량·맛이 우수하다), 滋養豊富(자양풍부·영양이 풍부하다)의 뜻이다./호암재단/
이병철이 생산한 국수 상표이다. 좌측 한자는 美味優良(미미우량·맛이 우수하다), 滋養豊富(자양풍부·영양이 풍부하다)의 뜻이다./호암재단/

이병철이 생산한 별표국수의 상표에는 3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3개의 별을 그려 三星(삼성)이라는 의미를 나타냈다. 국수 제조업을 한 이유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이 쌀과 곡식 등 식량 수탈을 많이 해가면서 식량이 부족하자 대용으로 국수를 생각한 것이다. 국수 가격은 한다발에 10전이다. 1박스에 60개씩 넣어서 6원에 판매했는데, 하루 100박스 이상 판매되었다. 월 매출도 2만원으로 당시로는 어머어마한 금액이다. 당시 삼성상회 자본금이 3만원이었다. 값이 조금 비싸도 좋은 재료로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생산 판매한 전략이 성공했던 것이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회고록 내용이다. “이 시기 아버지를 비롯 우리 가족은 공장 안에서 함께 숙식을 했다. 하루 24시간 가동하기 위해서였다. 국수 기계 소음과 밀가루 분진 속에 2년을 공장에서 생활했다.”

이병철의 한마디= 이병철은 훗날 기업가로서 크게 성공한 뒤에도 아버지의 말을 잊지 않고 항상 가슴에 새겨둔 좌우명이 있다. “비록 손해를 보는 일이 있더라도 신용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래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이래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이래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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