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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⑪ 서울에서 삼성물산공사 설립

[1부] 또 하나의 가족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⑪ 서울에서 삼성물산공사 설립

종로에 차린 무역회사 ‘삼성물산공사’ 세계로 뻗어나가다

기사입력 : 2021-09-10 08:03:50

“대구시장도 좁다. 더 큰 시장 서울로 가자.” 마산, 대구를 넘어 이번에는 서울에서 더 큰 사업을 시작한다. 무역 거래 대상지는 홍콩 등 동남아, 대상자는 화교 상인이 대부분이었다. 교역품목은 한국인에게 필요한 생활용품 등의 수입과 국내 특산품의 수출이었다.

20세기 중반 홍콩은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99년간 조차권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였다. 따라서 자유무역거래가 가능한 사회적 조건과 동남아시아 교통의 중심지역으로 지리적 조건까지도 우수하여 무역중심지로 번성한 도시였다. 신해혁명, 항일전쟁, 국·공내전 등으로 인해 본토의 많은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이주를 함으로써 홍콩의 도시 규모도 급속히 커졌다.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본토에서도 이주를 많이 해 국제무역항으로 비약적인 도시발전을 했다.

서울 종로 2가에 사무실 100여평 임차
1948년 무역전문회사 삼성물산공사 세워
초대사장 이병철, 부사장은 조홍제 맡아

초기엔 화교권, 점차 미국 등 대상국 확대
주로 생활용품 수입·국내 특산품 수출
설립 2년 만에 무역업계 최고기업으로


1948년 11월, 이병철은 서울에서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다. 회사명칭에 공사(公司)가 들어간 것은 무역의 주거래처가 홍콩을 비롯한 마카오, 싱가포르 등 화교권으로, 이들이 즐겨 쓰는 명칭이다. 이병철은 이러한 국제적 흐름도 잘 알고 있어 홍콩, 화교 상인들과 무역거래시 친근감을 가지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주식회사’ 대신 ‘공사’ 이름을 붙여 ‘삼성물산공사’로 회사명을 결정했다.

이병철은 형 이병각의 오랜 친구인 조홍제를 만나 삼성물산공사 경영에 동업을 요청했다. 삼성물산공사 초대사장은 이병철이었고 조홍제는 부사장을 맡았다. 직원은 약 20여명이고 사무실 위치는 종로 2가에 100여평의 사무실을 임차하여 삼성물산공사 간판을 걸었다.

당시 이병철의 삼성물산공사에는 특이한 운영방식이 있었다. 회사는 일정한 자본금의 규모를 정하지 않았다. 삼성물산공사 직원이라면 누구나 투자를 하여 이익이 날 경우 배당금을 투자액에 비례하여 공평하게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채택했다.

이병철이 사원들에게 20%만큼 출자를 하도록 한 것은 출자자들에게 회사의 이익이 곧 자신의 이익이 된다는 것이므로 서로 분배해서 회사를 키울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 함이다. 요즘은 사원들이 회사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일이 일반적이지만 당시만 해도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소화17년(1942년) 발행한 주식회사 삼성상회 법인등기부등본과 전표철(서류 묶음)./제일모직/
소화17년(1942년) 발행한 주식회사 삼성상회 법인등기부등본과 전표철(서류 묶음)./제일모직/

삼성물산공사는 초기에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국가에 오징어, 한천 등을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해 와 국내에 판매했다. 사업이 확대되자 강철 재료, 일용품 등 취급 품종도 수백종으로 늘려 나갔다. 무역 대상 국가도 미국 등 선진국으로 확장했다. 특히 면사 수입을 통한 판매사업은 활기를 띠었고 이익이 높아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설립 2년 만에 무역업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의 재벌 형성사’를 지은 수원대학교 이한구 교수는 “해방 전후 재벌기업으로 가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역업이라 하였다. 한국은 해방과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무역 대상은 주로 중국 상인들이었다. 당시 무역업에 대한 허가권은 미군정청에서 관리하였는데, 아편 등 마약만 아니면 무엇이든 허가해 주었다.

해방 직후 1년 6개월여 동안 홍콩, 마카오 등 무역 대상 지역이 다변화되어 갔다. 이병철과 조홍제도 이 시기에 무역업계의 주목을 받는 기업인이었다”고 설명했다.

삼성물산공사는 상공부에 등록된 543개의 무역회사 중 7위로 급부상, 폭풍성장했다. 호사다마랄까? 이렇게 짧은 시간 승승장구한 삼성물산공사는 6·25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LG그룹 창업주 구인회가 부산에 설립한 무역회사 ‘조선흥업사’도 미군정청으로부터 1호 허가를 받았던 것이 해방 이후인 1945년 11월이다.

삼성상회를 삼성물산공사로 회사명을 변경한 1949년 12월 19일 광고./제일모직/
삼성상회를 삼성물산공사로 회사명을 변경한 1949년 12월 19일 광고./제일모직/

# 삼성이라는 작명에는

이병철이 마산에서 처음 사업을 할 때 상호는 ‘협동정미소’와 ‘일출자동차’였다. 그리고 대구로 옮겨 ‘삼성상회’를 설립한 후 다시 ‘주식회사 삼성상회’로 변경했다. 처음으로 ‘삼성’이라는 이름을 주식회사 법인기업에 적용했다. 삼성이라는 이름 작명에 대해 이병철의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이다.

“삼성(三星)의 3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이다. 크다, 많다, 강하다를 상징한다. 그리고 숫자 3은 한국인들이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쓰러지지 않는 숫자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발이 세 개 있는 화로나 삼발이가 달려 있는 모든 기구들은 쓰러지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의 성은 밝다, 높다, 영원하고, 깨끗하다, 빛난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병철은 창업한 기업의 이름을 직접 작명하였는데 초기에는 ‘삼성’ 이름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제일’과 ‘중앙’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기업도 몇 개 있다.

협동정미소(창업) - 일출자동차(인수) - 삼성상회(창업) - 주식회사 삼성상회(변경) - 조선양조(인수) - 삼성물산공사(창업) - 삼성물산 주식회사(창업) - 제일제당(창업) - 제일모직(창업) - 한국비료(창업) - 삼성문화재단(창업) - 중앙일보(창업) - 중앙개발(창업) - 동양방송(인수) - 전주제지(인수) - 제일합섬(창업) - 제일기획(창업) - 호텔신라(상호변경) - 중앙엔지니어링(창업) 등은 삼성이 창업한 회사와 인수회사 일부분이다.

이 중 이병철은 회고록에서 제일제당과 중앙일보에 관해 작명 이유를 언급했다. 회사명을 제일(第一)로 한 것은 “일단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마음속 결심한 무슨 일이든 제일(최고)이 되자, 한국경제의 제일 주자로 국가와 민족의 번영에 기여하자의 결의와 일등이라는 큰 기대를 갖는 의미”라고 하였다.

1965년 창간한 일간지 제호를 중앙일보로 한 이유는 “중앙의 의미가 제일 크다”는 뜻을 담고 있어 중앙일보가 사회의 공공그릇으로 크게 역할을 완수해 주기를 기원한다고 하였다.

1938년 대구의 삼성상회 설립부터 삼성, 제일, 중앙 등의 혼재된 이름으로 사용되다가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 주식회사를 설립한 후에는 신설회사에 삼성이라는 명칭이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다.

사진 왼쪽부터 삼성물산공사 설립에 참여한 함안 출신 조홍제(효성그룹 창업자), 자본을 투자한 진주 지수 출신 허만정과 경영에 참여한 아들 허정구.
사진 왼쪽부터 삼성물산공사 설립에 참여한 함안 출신 조홍제(효성그룹 창업자), 자본을 투자한 진주 지수 출신 허만정과 경영에 참여한 아들 허정구.

# 삼성물산공사와 지수 거부 허만정

‘삼성물산공사’ 6자의 회사 이름과 역사에는 삼성그룹사의 한 켠을 차지하는 두 사람의 경영인이 있다. 훗날 효성그룹 창업주인 함안 출신 조홍제와 삼성물산 사장을 지낸 후 삼양통상 그룹을 설립한 진주 지수면 출신 효주 허만정의 장남 허정구이다.

허만정은 장남 허정구를 삼성물산공사 설립 때, 3남 허준구를 LG그룹 창업주 구인회가 부산에 설립한 무역회사 ‘조선흥업사’와 화장품 제조업인 락희화학을 설립할 때 경영에 참여시키고 자본을 투자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구씨 허씨의 동업 시작이다. 허만정은 진주 지수면의 거부로, 지금의 진주고등학교, 진주여자고등학교 설립의 주역이자 독립운동을 지원한 백산상회(백산 안희제)의 설립 발기인이기도 하다.

〈이병철의 한마디〉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절대로 피해야 한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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