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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마음과 마음 비슷한 것- 손상민(극작가)

기사입력 : 2021-09-16 20:25:15

“마음을 줬는데 마음 비슷한 것도 안 올 때는 참 속상하지.”

선생님 같았던 원로분에게 들은 말이다. 마음을 줬는데, 마음 비슷한 것도 받지 못했다는 말이 10년이 훌쩍 지나 다시 떠올랐다.

요사이 갑자기 터져버린 일로 삶이 휘청거렸다. 멀쩡한 줄 알았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고통을 호소했다. 아니 이미 한참 전부터 몸의 이상을 말해왔지만 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애들에게 신경 써야 한다는 변명으로 남편에게 선을 그었다.

“집안일이나 애들 돌보는 일은 도와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자기 건강에만 신경 써. 내가 자기 건강까지 챙기는 건 지금 상황에서 무리니까.”

의기양양하게 말을 하고 다시 노트북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을 때 남편의 한숨소리를 들었다. 아침이면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다며 말할 때도 피곤해서 그렇겠지 넘겨짚었고,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도 ‘40대면 다들 노안이 제일 먼저 온다더라’ 떠들었다. 별다른 일이었지만 별다르게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다 일이 생기기 몇 주 전부터는 한 번씩 새벽 2~3시에 잠이 깬 채 거실을 서성이는 그를 보았다. 왜 야심한 밤에 잠을 안 자고 밖에 나왔냐 물으면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는데, 그때마다 만져본 남편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뭔가 문제가 있긴 있나 보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남편의 몸이 무너졌다.

“발병 몇 주 후부터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하면서 나의 모든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 같은 스크린을 들여다보면 눈이 시렸다. 컴퓨터 모니터에 보이는 까만 글자를 읽는데도 눈이 너무 아팠고, 두통과 어지럼증과 구역이 더 심해져서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써야 할 정도였다. 소리에 대한 두통 반응은 더욱 심했다.”

미국 존스홉킨스 소아정신과 지나영 교수가 쓴 〈마음이 흐르는 대로〉라는 책에 나온 구절이다. 열심히 앞만 보며 달려온 저자의 삶을 한순간 와르르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자율신경 기능장애’였다. 증상의 차이는 있지만 남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자율신경 기능장애는 온갖 증상을 동반하지만 겉으로는 멀쩡한 데다 검진 상에서도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남편도 병원을 찾았지만 스트레스성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뿐이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의 저자 지나영 교수 역시 ‘장장 5개월에 걸쳐 열두 명도 넘는 전문의를 만나고 응급실도 서너 번 드나들며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지만’ 증상을 진단받지 못했다. 많은 의사가 그의 증상을 신체적 원인에 두지 않고 정신과적 문제로 치부했다. 정신과 전문의에게 우울증약을 처방하는 웃지 못할 일이 생긴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렵다며 입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긴급히 병원을 찾아 입원을 하고 일주일 후 퇴원을 했지만,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시시각각 달라지는 증상과 지난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불과 한 달 전의 일이다.

마음과 마음 비슷한 것. 남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던 시간이 후회스럽다. 마음은커녕 마음 비슷한 것도 주지 못했던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마음’을 놓쳐왔던가. 일상이 멈추자 비로소 든 생각이다.

손상민(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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