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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감성이 필요한 날- 허숙영(수필가)

기사입력 : 2021-12-30 21:12:50

바람 세찬 날이다. 옷깃을 여미고 생각에 잠겨 고개를 푹 떨구고 걷다 멈칫 섰다. 둥치가 한 아름이나 되는 메타세쿼이아 나목이 앞을 턱 가로막고 있다. 망연히 올려다보니 아득한 높이에 까치집이 매달려있다. 무성한 잎이 가렸다면 결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놓은 듯 심장 언저리쯤에 묵직하게 걸려있다. 마치 내 마음 깊숙한 곳의 삭이지 못한 응어리 같다. 화에도 색깔이 있다면 아마 저렇게 거무튀튀하리라. 저렇게 속을 낱낱이 꺼내 보여주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었을까.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연말이라 대형마트에서 양말과 속옷 등 가족들에게 줄 선물 몇 가지를 바구니에 담아 계산대에 놓았다. 계산원이 바코드를 스캔하는 동안 나는 가방만 들고 먼저 나왔다. 계산대를 통과할 물건을 기다리며 앞에 서 있자니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요란하게 옆 기계가 울어 댔다. 당황한 나는 소리의 진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나란히 붙은 옆 계산대인 것 같은데 직원은 내 가방에서 나는 소리라 했다.

내 가방에 계산을 하지 않은 무엇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내가 도둑으로 내몰린 것 같았다. 들이 대놓고 훔쳤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바라보는 눈초리에 의심이 가득했다. 나는 가방 안에 든 물건을 보란 듯이 하나씩 꺼내놓았다. 가방에는 하필 날을 바짝 세운 새 책이 한 권, 포장도 뜯지 않은 초콜릿이 한 통 들어 있었다. 날깃날깃한 지갑이나 지문으로 흐려진 휴대폰 같은 것들이야 오래되어 쓱 훑어보아도 알 수 있지만 개봉하지 않은 초콜릿을 바라보는 눈길들이 심상치 않다.

해가 바뀌는지라 문학회 회장 일을 탈 없이 마무리하도록 도와준 사무국장에게 점심을 샀더니 그녀도 선물이라며 책과 초콜릿을 내밀었다. 그걸 가방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새것이지만 이곳의 물건이 아니라고 나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큰 가방의 물건들을 다 털어내도 여전히 기계는 으르렁거렸다. 계산대 뒤에 늘어선 사람들은 흘끔거리며 내가 꺼내놓은 물건들을 일별하고 있었다. 초극의 시간에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억울함은 호소할 데가 없었다. 계산원에게 가방을 주며 털어보라고 했다. 무덤덤한 표정의 그녀는 남의 마음 따위를 챙길 여유가 없어 보였다.

급기야 나는 가방을 거꾸로 치켜들고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먼지 한 톨까지 탈탈 털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그만 가라고 했다. 꼭 죄지은 사람에게 선처를 해 주는 것 같았지만 나는 속을 꺼내 보일 수도 통곡을 할 수도 없었다. 마냥 바쁜 사람 붙잡고 입씨름을 할 수도 없어 찜찜한 기분을 풀지 못하고 빠져나오자니 뒷덜미를 낚아 채일 것 같았다. 끝까지 항의를 해야 했을까. 스스로 죄지은 일 없다고 위로하면 그만일까.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하라고 호통을 치지 못하고 무름하게 물러선 내가 한심했다. 감성 없는 로봇처럼 미안하다는 한 마디 언질도 없는 그녀도 기계와 다름없었다. 머잖아 인공지능 로봇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 한다. 이미 인공지능 세상이 도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봇 하나가 몇 사람 몫을 해내며 불구덩이 같은 곳에도 사람 대신 들어가 준다니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기계의 오작동은 누가 책임질까. 사람조차 기계화가 되어 감성을 잃어간다. 슬프다.

허숙영(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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