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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⑩ 이병철을 만나다, 삼성물산 설립 이야기

[2부] 여보게, 조금 늦으면 어떤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사업 논의하던 이병철과 ‘삼성물산’ 동업으로 인연 이어가

기사입력 : 2022-01-07 08:06:32

해방이 되던 해, 조홍제는 서울 명륜동 1가에 거처를 마련, 생활하면서 마산 육일공작소 고철사업과 관련하여 서울과 마산을 오갔다. 1947년 5월 어느 날, 혜화동으로 이사를 온 이병철이 인사차 조홍제를 찾아왔다. 이병철도 서울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대구를 떠나 서울로 왔었고, 두 집의 거리가 가까워 두 사람은 자주 만나 사업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홍제는 고철 등 철과 관련된 사업이 한국의 장래에 필요한 사업이라 이야기 하였다. 이병철은 지금 사회는 기간산업보다 생필품이 부족한 시기라 무역을 하여 생필품을 수입한 후 판매하는 것이 더 수익성이 높다고 하였다. 조홍제는 이병철의 ‘삼성물산공사’에 일정 금액 지분 출자를 하였다.


# 조홍제 삼성물산공사 부사장

그로부터 얼마 후 조홍제는 이병철로부터 삼성물산공사를 혼자서 운영하기에 힘이 든다며 함께 일을 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이미 자본을 투자한 조홍제는 삼성물산공사의 사업 내용에 대해 관심도 갖고, 경제학을 전공하였기에 무역에 대해 기본 지식이 있어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조홍제와 이병철의 첫 동업이 시작되었다. 이병철은 사장을, 조홍제는 부사장의 직책을 맡았다.

1949년 초가을, 마산 육일공작소 사업을 정리하고 삼성물산공사로 출근한 조홍제는 당시 무역 상대인 홍콩의 시장 견학과 거래처 사람들도 만날 겸 출장을 갔다. 요즘은 비행기로 4시간이면 되지만 당시에는 화객선을 타고 부산에서 홍콩까지 꼬박 8일이 소요되었다.

마산 오가며 ‘육일공작소’ 철가공사업 중
이병철 “삼성물산 운영 함께하자” 요청
일정 금액 지분 출자 후 부사장 맡아
홍콩 오가며 물물교환 형태 거래 첫 실현

한창 성장하던 중 6·25로 모든 것 잃고
이병철과  부산서 삼성물산 주식회사 설립
전란에 고철 수출·생필품 수입해 재도약
한국 대표 무역회사로 탄탄한 기반 확보

1950년대 홍콩의 풍경./조홍제 회고록/
1950년대 홍콩의 풍경./조홍제 회고록/

# 조홍제 홍콩 거래처 방문

조홍제는 홍콩의 거래처인 찬넬양행과 천우사, 그리고 교포 상인 임창복씨 등을 만났다. 당시 무역 거래는 한국이 외환보유액이 많지 않아 달러를 바로 주고 물건을 사는 것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외상거래도 하기 어려운 때였다.

조홍제는 출장 시 홍콩시장에서 인기가 있던 한국산 오징어 3만근을 가지고 갔다. 이 오징어를 임창복씨에게 맡기고 가격이 적당할 때 팔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대신에 오징어 값을 담보로 하고 ‘면사’를 외상으로 가져갈 수 있게 요청하였다. 즉, 오징어를 주고 ‘면사’를 오징어 값 만큼 바꾸어 가는 물물교환 형태의 무역이었다. 최초의 한국과 홍콩 외상거래가 맺어진 것이다.

홍콩에서 가지고 온 면사는 한국에서 좋은 가격에 팔렸다. 해방 후 물자가 부족한 시기라 어떤 제품을 수입해오더라도 국내시장에 내놓으면 판매가 잘 되었다.

홍콩 면실박(목화씨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 사료로 사용).
홍콩 면실박(목화씨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 사료로 사용).
한국산 오징어.
한국산 오징어.

# 6·25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다

삼성물사공사가 한창 성장하던 시기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서울이 적군의 통치하에 넘어가면서 보관하던 수입 물품의 보존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더 위급했다. 결국 해방 후 무역업을 통해 성장한 삼성물산공사는 전쟁의 영향으로 짧은 시간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된 후 조홍제는 삼성물산공사 임직원과 함께 6·25 직전 인천세관에 보관한 수입 설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분실된 일부 물품의 인수 직전인 1951년 1월 3일, 다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서울에 민간인 철수령이 내려지자 조홍제도 가족을 데리고 마산으로 피란을 갔다. 마산에는 육일공작소 경영을 하면서 마련해 둔 집이 있었기에 이곳에서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 부산에서 삼성물산 주식회사 설립

1951년 4월경 이병철이 마산으로 조홍제를 찾아왔다. “이승만 정부가 전쟁 복구를 위한 민간무역을 재개시킨다고 하니 남들보다 빨리 부산에 가서 무역업을 다시 시작하자”고 하였다. 두 사람은 곧바로 부산 동대신동에 ‘삼성물산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서울에서 설립한 ‘삼성물산공사’의 자산은 전쟁으로 인해 소멸되어 버렸다. 부산에 세운 ‘삼성물산 주식회사’는 조선양조 이익금과 전쟁 전 삼성물산공사의 사업으로 이루어진 홍콩 면실박(목화씨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 사료로 사용) 수출대금을 자본금으로 하였다.

이렇게 여러 자금이 모여지면서 회사의 지분 관계가 복잡하게 되었다. 이런 부분이 조홍제와 이병철이 동업 청산을 할 때 주요 쟁점이 된 것 같다. 전쟁으로 인한 생필품의 부족 현상은 물가의 폭등을 유발하는 시기였다.

삼성물산이 수입하여 도매상에 넘긴 지 2~3일도 되지 않아 그 가격이 몇 배씩 치솟는 시기였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수입 물품 중 특히 설탕과 비료는 늘 부족할 정도로 잘 팔려나갔다.

삼성물산공사와 삼성물산주식회사는 오징어와 면실박, 고철을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해 초기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다.
삼성물산공사와 삼성물산주식회사는 오징어와 면실박, 고철을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해 초기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다.

# 고철수출로 또 한 번 도약하다

전란의 시기에 삼성물산이 수출입을 통해 또 한번 큰 이익을 창출한 품목이 고철이다. 전쟁으로 많은 시설과 군사 장비가 파괴되어 있었다. 이런 고철을 모아 일본에 수출을 하여 많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조홍제 역시 해방 이후 첫 사업을 마산 육일공작소에서 고철 관련 일을 하였기에 고철에 관한 기본 지식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으로 고철을 수출하는 것에 승인을 하지 않아 잠시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1951년 여름이 되어서야 대일 고철 금수 조치를 해제하면서 일본 수출이 가능해졌다.

삼성물산도 정부로부터 일본 수출 5만t 허가를 받았다. 조홍제는 전쟁의 피해가 심한 서울을 비롯 전국에 산재된 고철 수집할 팀을 구성하였는데, 동생 조성제가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고철을 모아 수출하고 이 돈으로 한국에 없는 생필품을 수입하여 판매하고 이익을 창출한 삼성물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무역회사로 탄탄한 자리를 확보하였다.

전쟁 후 유통되는 화폐 중 가장 큰 것이 10원짜리 지폐였다. 고철수집 대금은 오늘날처럼 온라인 이체가 되지 않는 시기였고, 금융기관도 전쟁 후 업무를 보지 않는 곳이 많아 송금도 불편한 시기였다.

외상으로 구매 시 타사와 경쟁력이 되지 않았기에 결국 고철 구매 후 바로 현금 지불하는 방식밖에 없었다. 도둑이나 강도를 만나면 목숨까지 위태로운 시기였다. 아이디어를 낸 결과 현금 부피가 너무 커서 지폐를 넣은 베개를 만들어 숙소에서 베고 자거나 차 안에 싣고 다니면서 타인의 눈을 속이는 방법을 사용했다.

조홍제는 회고록에서 “지금과 같이 경영전문가가 많지 않았던 시기에 의논할 상대도, 자료도 없었다. 오직 경영자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하는 고통이 있다. 경영자는 기업을 키워 나가기 위해, 타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용기있게 위험을 무릅쓰고 추진하는 과정은 매우 힘든 일이다”고 하면서 경영자의 고충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조홍제의 한마디> 장사는 돈보다 사람의 신의가 있어야 한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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