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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 섣달그믐 - 이상권 (서울본부장)

기사입력 : 2022-01-24 21:36:02

조선 시대 과거시험 마지막 관문은 책문(策問)이다.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서 왕이 직접 물었다. 가장 시급한 국가정책, 즉 시무책(時務策)이 대체적 주제였다. 광해군은 1616년 증광회시에서 예상 밖의 질문을 던졌다. “가면 반드시 돌아오니 해이고, 밝으면 반드시 어두우니 밤이로다.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데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섣달그믐밤의 서글픔’이란 감성적이면서도 허를 찌르는 질문에 21살 청년 이명한은 세상 이치를 꿰뚫은 듯한 답을 내놨다. 그는 “인생이란 부싯돌의 불처럼 짧고 우리네 인생도 끝이 있어 늙으면 젊음이 돌아오지 않는다”며 인생무상을 개탄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이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다”고 했다. 이명한은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인 이정구의 장남으로 그의 아들까지 3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냈다.

▼섣달그믐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정월 초하루로 이어지는 단순한 물리적 시간이지만 감회는 유별하다. 삶을 반추하는 상념과 회한이 교차한다. 묵은해가 훌쩍 떠난 자리엔 나이 듦의 허무가 엄습한다. 세월은 좁은 문틈을 통해 달리는 말을 보는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간다. 한 번 가면 되돌아 오지 않을 덧없는 인생이다. 공자는 천상지탄(川上之嘆)이라고 했다. “가는 것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는구나.”

▼곧 섣달그믐이다. 가는 세월이 야속하지만 안타까움은 부질없는 넋두리다. 참된 삶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할지 마음을 다잡는 계기로 삼을 뿐이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 하지만/보시게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산다네’(학명선사. 몽중유)

이상권 (서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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