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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트러스트 앤 더 시티(Trust And The City)- 이용민(통영국제음악재단 대표)

기사입력 : 2022-04-18 20:42:21

지난 3일, 통영 국제음악제 열흘 간의 장정을 마무리했다. 올해는 음악제 20주년이자 세계적인 작곡가 진은숙이 예술감독으로 데뷔하는 해여서 일찌감치 안팎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의 장기화와 갑작스러운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해외 연주자들의 출입국과 항공수송에 큰 어려움이 닥쳤다. 출연이 예정된 주요 연주자가 확진이 돼 공항에서 돌아가거나 앙상블과 오케스트라 멤버 중 확진자가 나와 급히 연주자를 대체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결과적으로 이번 음악제 전체 출연자 약 5백여명 중 70여명이 이런저런 이유로 당초 예정했던 프로그램을 소화하지 못하고 대안을 찾아야 했으니 사무국 분위기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다행히 이런 비상상황에서도 고도의 순발력을 발휘하며 음악제를 성료 할 수 있었던 것은 20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 낸 경험과 구성원 상호 간의 ‘신뢰(Trust)’가 가장 큰 동력이 됐던 것 같다. 신뢰는 단순한 믿음을 넘어 오랫동안 같이 일해 온 동료들이 서로에게 기대하는 성취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어서 이번 음악제의 또 다른 성과라 하겠다.

신뢰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관계 속에서 생성하는 최고의 감정이다. 그런데 문득 인간이 아닌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나의 신뢰, 또는 도시가 나에게 주는 신뢰는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 생겼다. 도시란 무엇인가. 단순히 행정구역의 분류체계로만 볼 수 없는 각각의 모양과 스토리가 있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기질을 담고 있다. 이 기질이라는 것이 나와 맞지 않으면 그곳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매우 곤혹스러울 것이며 반대의 경우에는 인간과 도시 간의 신뢰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도시는 어떤 이에게는 망향의 대상이고 어떤 이에게는 삶의 터전이며 또 어떤 이에게는 경쟁과 정복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신뢰의 기반이 없다면 그 도시에서의 생산성이나 쾌적성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도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도시를 중심에 둔 사업들이 광범위하게 전개됐다. 국내에서도 도시를 화두로 삼은 많은 정책과 공모사업들이 쏟아져 나왔다. 통영은 그 흐름에 맞춰 ‘유네스코 창의도시’에 도전했으며, 그 과정에서 도시의 정체성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다. 과거에 통영은 ‘예향’ 또는 ‘예술의 도시’로 불렸지만 이보다는 ‘예술가의 도시’가 훨씬 설득력 있다고 판단돼 유네스코에 ‘City of Artists’가 기재된 지원서를 접수했고 그 결과 국내 최초의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 선정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게 됐다. 통영은 이후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은 예술가의 도시에 매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고 근년에 유치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 통영캠퍼스’ 또한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을 중심으로 선거구제와 부울경 메가시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앞서 창원특례시 출범이라는 성과도 있었다. 과거에 우리는 지금 주창하는 제도와 카테고리를 경험했던 적이 있으며 마창진의 통합과정에서 많은 교훈을 얻기도 했다. 도시의 역사와 모양 그리고 성격과 기질을 대수선 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단순히 정치적 이벤트에 머물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로버트 퍼트남은 신뢰 또는 사회자본이 확실하게 정착되면 민주주의가 발달한다고 했고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신뢰가 높은 사회는 문명적 자본주의가 발달한다고 했다.

도시를 단순히 ‘문명을 이룬 땅 덩어리’ 정도로 치부하면 그곳에서 우리의 미래를 담아낼 수는 없다. 도시는 나와 나의 가족 그리고 친구의 일부이며 때로는 전부이다. 도시는 거대한 유기체이다. 나와 도시 간의 신뢰는 건강한 미래, 충만한 자존감, 안정된 감정을 보장해 주며 공동체의 번영에 이바지하는 최상위 덕목인 것이다.

이용민(통영국제음악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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