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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3부 ⑬ 전자 사업에 도전, 금성사 설립

[3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화장품·플라스틱 제조 10년 만에 전자산업으로 승부수

기사입력 : 2022-05-13 07:58:47

잊혀지지 않는 광고 문구가 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기술의 상징 금성”

이 광고의 주인공 금성사는 1958년 10월에 설립됐다.

구인회가 창업한 제조업은 1947년 설립한 락희화학공업사이다. 크림 화장품에 이어 1952년 빗, 칫솔 등 플라스틱 가공품을 생산했다. 마침내 10년 만에 제조업의 과감한 변신을 시도해 전자 사업에 도전을 했다.

구인회가 전자사업을 시작한 계기는 1957년 락희화학 서울사무소를 방문했을 때 음악이 흘러나오는 전축을 보고 난 후였다.
구인회가 전자사업을 시작한 계기는 1957년 락희화학 서울사무소를 방문했을 때 음악이 흘러나오는 전축을 보고 난 후였다.

# 갈등 - 만족과 도전의 갈림길

합성수지 가공은 비닐시트에서 PVC 파이프, 비닐장판, 폴리에틸렌 필름, 스펀지 등으로 농촌의 농업 현장, 도시와 가정의 산업현장 등 가릴 곳 없이 필수제품이 되었다. 락희화학이 국내 플라스틱 공업의 70%를 차지할 정도였다.

사출성형기는 ‘돈 찍는 기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업이 호황을 누리면 당연히 후발업체가 생기면서 더 새로운 기계를 도입해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진다. 락희화학도 고민에 빠졌다. 오직 플라스틱 공업에만 전념해 선두기업이 되느냐, 아니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사업 품목을 찾아 도전해 한 단계 더 도약하느냐가 주요 과제가 되었다.

신문에 게재된 LG 75주년 광고. 1947년 동동구리무를 생산한 락희화학공업사의 설립부터 시작된다.
신문에 게재된 LG 75주년 광고. 1947년 동동구리무를 생산한 락희화학공업사의 설립부터 시작된다.

# 전축에서 시작된 전자 사업 구상

1957년, 구인회가 서울 반도호텔 락희화학 사무실을 방문했다. 마침 윤욱현 기획실장이 새로 나온 LP 레코드를 전축에 올려놓고 음악을 틀어 놓았다. 윤욱현 기획실장은 락희화학 입사 전 미국계 무역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영어가 능통해 각종 외국 잡지를 구입해 읽으면서 폭넓은 국제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구인회는 처음 보는 전축에 대해 신기함과 동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마침 얼마 전 구인회는 일본 통산성에서 제작한 ‘통산백서’에 앞으로의 유망사업은 ‘석유화학공업과 전자공업’이라는 내용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구인회는 윤욱현 기획실장에게 외국의 산업에 대해 설명을 듣고 락희화학이 전자 사업에 진출할 검토서 작성을 지시하고 이 내용을 임원들에게 알렸다. 당시 한국에는 전구, 소켓, 건전지, 변압기, 전선, 전동기 등 전기기기를 만드는 영세한 작은 가게가 몇 곳 있었지만 전자 공업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시기였다.

# 구자경 - 아버님, 전자사업 해 볼 만합니다

구인회는 절대적인 반대를 예상했는데 의외로 임원들의 찬반 논쟁이 팽팽했다.

반대 의견은 “아직 전자공업 진출 시기가 아니다. 사업 분야도 생소하다. 미군 부대와 밀수를 통해 하루에도 수백 대씩 최신형 라디오가 판매돼 경쟁이 힘들다. 이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락희화학마저 자금 곤란과 위험에 처해진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찬성 의견은 “플라스틱 사업은 단순가공업이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 수익성이 악화된다. 새로운 기술 분야 진출은 바람직하다. 전자산업은 미래의 먹거리가 된다”는 것이었다. 찬반 의견이 쉽게 결론이 나지 않자 구인회는 아들 구자경을 불러 의견을 들어 보았다.

“아버님, 사업은 모험이고 도전입니다. 어떻게 준비를 하느냐가 성패의 관건이지 기술이나 경험이 우선하지 않습니다. 전자공업 사업은 꼭 필요한 사업입니다. 우리 락희화학 정도면 한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인회는 결심했다. “사업은 먼저 손을 대는 사람이 고생을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지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다. 그래 시작하자!”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 설립 후 크림 이어
국내 플라스틱 공업의 70% 차지했지만
사업 호황에 경쟁 치열해지며 고민하다
전축 통해 전자사업 진출 위한 기획 수립

1958년 10월 부산 부전동에 ‘금성사’ 설립
석 달간 선진국 9개국 산업현장 견학 후
전자사업 제안자 윤욱현 믿고 사업 맡겨
1959년 2월 ‘주식회사 금성사’ 공식 발족

# 3개월간 선진 국가 전자산업 견학

1958년 초 락희화학은 전자사업 진출을 위한 구체적인 기획을 수립해 나갔다.

1958년 10월 부산 부전동에 있던 금성합성수지공업사를 새로운 전자산업을 시도할 기업으로 지정하고 회사의 명칭을 ‘금성사’로 개칭하였다. 이날이 금성사 역사의 시작이다.

1958년 11월, 구인회는 전자사업 제안자인 윤욱현 기획실장과 함께 선진국의 전자공업 시장을 견학하기 위해 홍콩, 이탈리아, 스위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9개국을 3개월간 다녔다. 사업을 시작하고 27년 만에 처음으로 유럽과 미국의 산업현장을 본 구인회는 놀라움과 충격의 연속이었다.

구인회는 유럽과 미국 출장 중 서양 사람들이 잘살게 된 까닭을 알게 됐고, 귀국하면 바로 시작해 한국 사람들도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전자제품을 만들겠다는 강한 결심을 잊지 않았다.

# 윤 상무 ‘니(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100여일 만에 귀국한 구인회는 윤욱현 실장을 생산 담당 상무로 진급시키고 그 유명한 한마디를 남긴다. “윤 상무, 이제 부산가서 니 하고 싶은 대로 한 번 해 봐라.”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시작을 알리는 한마디이다.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그 뜻은 전자사업을 위해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성공시켜라. 전적으로 믿고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나는 니를 믿는다’는 뜻이다. 이에 앞서 준비팀은 1958년 12월, 국제신문에 직원모집 공채 광고를 냈다. 럭키 치약과 플라스틱 생산으로 성공한 락희화학에서 라디오를 생산하기 위해 금성사를 설립했고, 직원을 뽑는다는 광고였다. 기술직 응시자 28:1, 기능직 응시자 15:1의 경쟁을 뚫고 금성사 공채 1기에 훗날 라디오의 전설이 된 ‘김해수’ 외 2명이 선발되었다.

# 금성사(Gold Star)의 출범

1959년 2월, 해외여행을 통해 전자공업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 구인회는 ‘주식회사 금성사(현 LG전자)’를 공식 발족하고 법원에 등기하였다. 상표는 ‘왕관 무늬’ 도안과 영문 표기 ‘Gold Star’이다. 경영진은 사장 구인회, 부사장 구정회, 상무 허준구, 이사 허학구, 구자경, 감사 김주홍, 금성사 서울사무소 상무 박승찬, 공장 담당 상무 윤욱현이었다.

금성사 공장은 부산 연지동 341로 결정하였다. 초기 금성사의 시설투자는 규모가 커서 락희화학이 가지고 있던 여유자금을 모두 다 소진할 정도였다.

그룹 명칭이 1974년 럭키그룹에서 1983년 럭키금성그룹, 1995년 LG그룹으로 바뀌었고, 기업 CI도 변화를 가졌다. 현 LG그룹의 기업 로고에 영감을 준 신라의 미소로 알려진 보물 2010호 ‘얼굴무늬 수막새’./국립경주박물관/
그룹 명칭이 1974년 럭키그룹에서 1983년 럭키금성그룹, 1995년 LG그룹으로 바뀌었고, 기업 CI도 변화를 가졌다. 현 LG그룹의 기업 로고에 영감을 준 신라의 미소로 알려진 보물 2010호 ‘얼굴무늬 수막새’./국립경주박물관/

# 금성사(현 LG전자) 이름의 탄생

회사 이름 금성사는 윤욱현 상무의 아이디어이다. 윤상무는 금성이라는 별은 신비하고 무한하며 끝없는 가능성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상징한다. 한자로 金星이다. 금(金)은 황금을 뜻하는 Gold이다. 성(星)은 별을 뜻하니 영어로 Star이다. 황금별 Gold Star의 작명이다. 1983년에는 그룹 이름이 ‘럭키금성그룹’으로 되면서 금성사는 회사를 대표하는 한 축이 되었다. 1995년부터 사용한 그룹명 LG는 Lucky Gold Star의 머리글로 알려져 있다.

1960년부터 1990년대까지 럭키(현 LG)그룹의 재계 순위./공정거래위원회
1960년부터 1990년대까지 럭키(현 LG)그룹의 재계 순위./공정거래위원회/

# 한국기업계, 그룹의 등장

1950년대 후반 한국 기업계는 그룹, 재벌, 대기업 등의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1인 기업주가 여러 개의 회사를 거느리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언론이나 통계기관에서 1960년대 삼성그룹, 삼호그룹, 개풍그룹, 대한그룹에 이어 반도상사, 럭키유지, 금성사 등의 계열회사를 가진 락희화학 기업을 국내 5위의 ‘럭키그룹’으로 불렀다. 그 후 호남정유의 설립으로 1972년에는 삼성그룹에 이어 럭키그룹이 국내 재벌순위 2위로 수직 성장했다.

<구인회의 한마디> 남이 안하는 것을 하라. 착수하면 과감히 하라.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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