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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17) 밀양 무안용호놀이 기능보유자 조희윤

“농촌인 무안 살리려 550년 전통 용호놀이 살려냈죠”

기사입력 : 2022-08-25 20:47:57

놀이가 아니라 전투였다. 숫제 전쟁이었다. 쉬는 시간엔 함께 웃으며 농담하다가도 한 판 드세게 붙을 땐 표정이 바뀌며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수백명이 편을 갈라 상대를 들이받으며 밀어붙이는데 그 찌를 듯한 기세는 상대를 반드시 꺾어 놓고야 말겠다는 투지로 불타고 있었다. 밀양 무안의 24개 법정부락 60여개의 자연부락민이 모두 모여 용과 호랑이 두 패로 나누어 상대를 격파하는 이 ‘놀이’는 짚으로 길고 두텁게 용과 호랑이를 상징하는 큰 줄을 만들고 서로를 무지막지하게 때려 밀친다. 승리해야만 풍년이 든다는 믿음 때문에 ‘놀이’는 종종 ‘전투’가 된다.

밀양 무안용호놀이 조희윤 소도구 기능보유자가 호랑이탈을 손보고 있다./밀양시/
밀양 무안용호놀이 조희윤 소도구 기능보유자가 호랑이탈을 손보고 있다./밀양시/

이 놀이는 원래 장군복장을 한 양쪽 대장이 줄 앞쪽에 타고 고함을 쳐서 상대방의 기를 죽이며 서로 부닥쳐서 승부를 내기도 하고, 대장끼리 직접 줄 앞머리에서 맞붙어 상대를 떨어뜨려 승리를 확정짓기도 했다. 또 양쪽 줄 위에 호랑이와 청룡을 각각 만들어 태우고 이를 먼저 빼앗는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는데 모두 진짜 전투를 하듯 너무 격렬하게 싸워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래서 좀 더 안전을 확보하면서 놀이를 진행하기 위해 청룡 줄에는 여의주로 분장한 소년이 타고, 백호 줄에는 금양(金羊)으로 분장한 소년이 타서 양쪽 줄이 마주칠 때 이 소년들이 상대방의 깃발을 뺏으면 승리하는 것으로 룰을 바꾸었다. 원래는 2000여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동원되었지만 지금은 규모를 대폭 줄였다는데도 참여인원이 500명이 넘는다.

조희윤 기능보유자가 용호놀이에 사용되는 용의 탈을 어루만지고 있다.
조희윤 기능보유자가 용호놀이에 사용되는 용의 탈을 어루만지고 있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2호 밀양 무안용호놀이는, 명칭엔 분명히 ‘놀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막상 전개되는 양상은 치열하다. 누가 이를 보면 놀이를 생각할까. 아무리 봐도 놀이보다는 전투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물음에 조희윤(73) 용호놀이 기능보유자도 그 말이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제식민지 때 일본인은 이 놀이의 세력이 위험하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게 두려워서 놀이문화 중 무안용호놀이를 아예 지워버리기 위해 탄압했다고 했다. 말하자면 일제 식민지 때는 용호놀이가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독립에 힘을 보탤 전투조직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돌아 온 답.

“밀양 무안은 승병이자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무수한 공을 세웠던 사명대사의 고향입니다. 그 정신이 무안용호놀이에 깃들어 있죠. 식민지 시절에도 여차하면 일어날 수 있도록 군사훈련 하듯 용호놀이를 발전시켰으니 이 놀이가 전투적이라고 해서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셈이지요.”

용과 호랑이를 상징하는 서부마을과 동부마을 장정들이 큰줄을 밀어붙이며 상박하고 있다./보존회/
용과 호랑이를 상징하는 서부마을과 동부마을 장정들이 큰줄을 밀어붙이며 상박하고 있다./보존회/

밀양 무안용호놀이는 약 550년 전부터 정월대보름 날을 전후하여 밀양 무안면에서 연래행사로 전래해오고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전통도 유구하지만 일단 규모가 엄청나다. 2000명 이상이 참여하던 행사가 공연장의 한계와 줄어드는 인구 때문에 줄이고 줄여서 현재는 약 500여명 정도가 참여한다고 했다. 용호놀이는 총 5마당으로 진행된다.

첫째 앞마당(지신밟기, 진지구축, 시화연풍)은, 농악의 흥겨운 가락에 따라 동부, 서부 양편이 차례로 마당에 들어와 놀이터 둘레를 돌면서 지신밟기를 하며 동부, 서부 양편은 각각 자기편에 자리를 잡고, 한 해 풍년이 들고 두루 태평하기를 비는 시화연풍의 즐거운 한마당 춤을 춘다.

둘째 놀림마당(야유, 부름마당, 싸움준비) 놀이가 시작되기 전 기 싸움이다. 양편의 몇몇이 상대편의 놀이터에 가서 은근히 놀리고 야유하며 싸움을 건다. 용과 호랑이는 놀이터 한가운데서 재롱을 피우며, 자유롭게 어울려 장난을 걸고 놀다가 장졸들이 모이면 호호딱딱 가락에 따라 진영을 가다듬고 비로소 싸움을 준비한다.

셋째 비는마당(하늘에 빌고, 필승다짐). 한바탕 싸움을 앞두고 자기편이 꼭 이겨야 풍년이 들고 무사태평하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늘에 빈다. 용호의 큰 줄 머리와 놀이꾼들 모두가 대장의 지휘에 따라 하늘을 우러러 ‘여아- 여아- 여아-’ 고함 소리와 함께 줄을 추겨 올렸다 내렸다 하며 필승을 다짐하는데 그 위세가 자못 장중하다.

넷째 싸움마당(어르고 싸우며 환호, 진편은 통곡). 역꾼들은 대장이 탄 줄을 메고 농악 장단에 맞추어 줄을 어르면서 전진, 후퇴를 반복하다가 총돌격의 명령에 따라 줄 머리를 들이받아 빗겨 돌면서 격렬한 전투를 벌인다. 싸움이 충분히 무르익을 무렵 기회를 노려 여의주와 금양은 상대편 줄 머리에 건너간다. 영기를 먼저 빼앗은 쪽이 이겼다고 환호를 하면 진편은 땅에 엎드려 통곡을 한다.

다섯째 뒷마당 (화합과 신풀이로 화동의 대단원). 승부가 끝나면 다시 서로 화합과 친목 그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한바탕 신풀이로 화동의 대단원을 이루고 이긴 편부터 서서히 퇴장한다.

용호놀이의 원형은 줄다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벼를 재배하고 남은 볏짚으로 줄을 꼬고 편을 나눠 당기며 승패를 결정짓는 줄다리기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남아전역 농경사회에서 공유되는 민속놀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여기에 더해 용호놀이처럼 줄을 거대한 용 모양으로 만든 것은 용신사상과 관계를 짓는다. 용은 물과 연결된 신성한 대상이고 농사는 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안의 진등산과 질부산은 그 형세가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고 있어, 동쪽은 동부마을로 청룡편이 되고 서쪽은 서부마을로 백호편으로 나눈다. 그리고 3~4일간 무안강변과 논바닥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줄다리기 행사를 했다. 현대의 무안 용호놀이는 마을 주민들의 단합과 친목을 도모하는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 조희윤 용호놀이 기능보유자가 있다.

밀양 무안용호놀이 조희윤 소도구 기능보유자
밀양 무안용호놀이 조희윤 소도구 기능보유자

무안 토박이인 그는 원래 무안농협의 직원이었다. 당시 농민들의 자제들은 대부분 도시로 나가는 현상이 지속되면서 농촌을 살리기 위한 방편이 필요했다. 직장의 특성상 지역농민들과 늘 대화를 하고 그들의 애환과 어려움을 들어주는 과정에서 마을주민을 하나로 단합할 필요를 느꼈고 전통의 무안용호놀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용호놀이 예능보유자가 별세하면서 1977년 6월에 지정되었던 무형문화재 자격이 1985년 10월에 자연 소멸되는 불운을 맞는다. 그렇지만 현재의 조희윤 보유자를 비롯한 마음 맞는 마을사람들이 합심하여 용호놀이를 재현해내는 노력의 결실로 1991년에 경남무형문화재 복원 재지정 되는 쾌거를 누렸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그는 아직도 현장에서 뛰고 있다. 규모가 너무 커서 자주 공연하지는 못하지만 일년에 3~4회는 반드시 공연을 선보인다고 한다.

어려운 점을 묻자 그는 “경남도무형문화재 보유자와 전수자를 비롯한 대부분 관계자들은 경남도청 문화예술 관계자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지원금이나 무형문화재 심사 때 대부분 교수들로 구성된 학술전문가들만 모여 자기들끼리 심사하고 결과만 알려주는 식입니다. 이런 일은 학술전문가와 현장전문가가 함께 모여 심사하는 것이 조화로운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어째서 현장전문가를 소외시키는지 그 내막은 모르겠지만, 저희들 마음이 상당히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김홍섭 소설가
김홍섭 소설가

김홍섭(소설가)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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