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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18) 통영 승전무(칼춤) 예능보유자 엄옥자

운명이 이끈 춤꾼의 삶… 승전무의 어제와 내일을 잇다

기사입력 : 2022-09-01 21:28:38

한 분야에 업적을 남긴 예술인은 우선 재능을 타고나야 하지만, 주변에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과 운명적인 만남이 없다면 지속적인 성장을 거쳐 결실을 거두기 어렵기 때문에 엄옥자 예능보유자를 만나 이를 중심으로 듣고자 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칼춤) 엄옥자 예능보유자는 교육계에서 40여년을 근무하면서 춤에 대한 논문 30여편, 60여회의 학술발표, 150여회가 넘는 공연, 세계 30여개 국을 오가며 세계민속무용 페스티발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틈틈이 책을 집필해 4권의 저서를 발표한 한국무용 분야에서 우리 시대의 명인이라 할 수 있다.

통영 승전무 칼춤을 추는 엄옥자 보유자./통영승전무보존회/
통영 승전무 칼춤을 추는 엄옥자 보유자./통영승전무보존회/

그가 성장한 통영이 예향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임진왜란 때 통영 주변이 격전지로 변하고 군사 전략상 요충지가 되면서 삼도수군통제영이 1604년경 이곳으로 옮겨 오자 군사도시로 성장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많은 인구가 유입된다. 통제영 소속으로 예술의 혼이 깃든 공예품을 만들던 12공방과 예능인(기녀)과 악사를 양성하던 교방청과 취고수청(吹鼓手廳)이 있어 통영은 수백년 동안 예맥이 이어졌고 많은 예술인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승전무 칼춤의 한삼춤.
승전무 칼춤의 한삼춤.

엄옥자 예능보유자는 1943년 경남 충무시 향남동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가 한의사를 하여 어린 시절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가 춤, 시조창, 가무를 즐겼고, 장구와 북을 잘 쳤으며 소금도 잘 불었다. 또, 운동을 좋아해 경남대표로 전국 국궁대회에도 나가 입상을 할 정도로 풍류객이었다. 아버지가 손님 접대를 위해 요정출입을 자주 했고, 어린 엄옥자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약방에 근무하던 아저씨와 함께 아버지를 모시러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어깨 너머로 기방 구경을 하면서 기녀들의 춤과 노래를 보고 들으며 자랐다. 어머니도 춤을 좋아해 명인으로부터 춤을 배웠는데, 어릴 때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 다니며 춤을 배울 수 있었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도 늘 춤과 함께했고, 고등학교 때 성적이 좋아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모 대학 약학대학에 지원해 합격통지서를 받았으나, 아버지께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하고 경희대 체육과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65년 경남여고에 교생으로 가니 통영(충무)출신 유치환 시인이 교장으로 있었다. 교생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경남여고에서 교사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유치환 교장으로부터 면담이 있어 갔더니 전혀 예측 못한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고향에서 너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교생이 끝나면 빨리 통영으로 가서 모교인 통영여고 이민기 교감을 만나라고 했다. 이민기 교감은 시인으로 청마 유치환과 잘 통하는 사이였다. 그를 만나자 사라질 위기에 있는 승전무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이민기 교감의 설득으로 1965년 모교의 무용교사가 된다.

그 후 통영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김희룡 교장, 이민기 교감, 당시 통영에서 최고의 한량으로 통하던 김태현, 엄옥자 등이 서호동 마돈나 다방에서 모임을 가지고 승전무 발굴에 뜻을 모았다. 이민기 교감이 곧 통영한산대첩제전이 열릴 것이니, 군점행열 속 8선녀가 등장하는데, 8선녀가 추는 춤을 잘 보라고 했다.

이즈음 김태현의 동거인이며 마지막 승전무 춤꾼인 정순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정순남은 13세에 권번에 들어가 김해근으로부터 3년간 입춤, 검무, 북춤을 배웠으며 소질이 뛰어나 16세부터 이충무공 관련 각종 향연에 불려 다니며 35세까지 춤을 추었으나, 1945년 광복과 그 후 한국전쟁 등으로 춤출 기회가 없어져 당시 60세 정도로 평범한 부인으로 있다고 했다.

정순남을 만나자 자신이 과거에 기녀였던 것이 들어날까 망설이며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다. 김태현이 세상이 바뀐 것과 춤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며, “앞으로 좋은 시절이 올 것 같으니, 이제 춤을 추어도 되지 않겠느냐?”며 격려하자 그가 마음을 조금씩 열었다. 이리하여 정순남(1906~1983)을 스승으로 모시고 입춤, 칼춤, 북춤을 사사 받으며 승전무 발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처음에 배울 장소가 없어 서울대 약대를 나와 서호동에서 약국을 하던 숙부댁 거실, 통영여고 교실과 운동장, 세병관 등으로 옮겨 다니며 배워야 했다. 운동장에 회오리바람이라도 불면 먼지를 다 뒤집어쓰고 입으로 모레가 들어와 씹히기까지 했다.

승전무 중 칼춤 추는 엄옥자 보유자.
승전무 중 칼춤 추는 엄옥자 보유자.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승전무로 장졸들의 사기를 북돋고, 전쟁에 승리한 후 축하 공연에도 무희들이 나와 이 춤을 추었고, 이순신 장군 작고 후에는 탄신제, 기신제 등에도 이 춤이 빠지지 않았을 정도로 이순신 장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런 전통이 오래 동안 계승되어 오다 갑오개혁으로 제도개혁이 일어나면서 1896년 통제영이 혁파되고 얼마 후 조선이 망하는 곡절 속에 춤도 위기를 맞이한다. 기생을 양성하던 교방청과 악공을 양성하던 취고수청은 통제영과 함께 사라지게 되고, 그 후 일제 때 기생조합과 악공조합이 생겨난다. 교방청에 소속되어 있던 김해근이 기생조합에서 이국희, 정순남 등 제자를 양성시킨다. 통영 승전무가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정순남과 그의 스승 김해근을 빼놓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깨닫고 1968년 문화재를 지정할 당시 정순남 선생이 생존해 있어 전승이 가능했으며, 그는 춤을 가르치면서 “기상이 당당해야 하며, 용맹이 있게 춰라”라는 말을 강조했다. 1968년 문화재 지정 때 칼춤과 북춤을 합친 것이 승전무인데 칼춤(검무)은 진주검무가 있다며 제외되었고, 북춤만 국가중요무화재 제21호로 정순남, 엄옥자, 이갑조(장고), 주봉진(젓대)이 인정된다. 엄옥자는 이때 26세에 전국 최연소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으나, 1971년 연령제한으로 이마져 인정에서 해제된다.

많이 서운했을 것 같아, 그때 심정을 물었더니 집안이 넉넉해서 별로 서운한 마음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경희대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1974년 〈영남검무의 춤사위연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77년부터 부산대학에서 32년 8개월간 무용을 가르치면서 지속적으로 승전무 보급에 힘썼다. 1987년 통영 승전무에 다시 칼춤이 포함되면서 준보유자가 되고, 예능보유자에서 해제된 지 26년이 지난 1996년 다시 칼춤으로 예능보유자에 재인정되었다.

엄옥자 예능보유자에게 다른 지역칼춤과의 차별화에 대해 물었더니, 진주에서는 명칭을 한자어인 검무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통영은 옛날 어른들이 사용해온 우리말 그대로 칼춤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진주검무가 외향적이고 대범한 엇사위가 많다면, 통영칼춤은 내향적이고 세련된 잦은 사위와 겨드랑 사위가 많다며 차이를 말한다. 이런 원인은 전수과정에 아마 통영 오광대의 영향을 받은 것 같고, 통영칼춤은 공연장소가 주로 협소한 배 안이나 좁은 공간에서 연희를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해석한다.

2008년 부산대학교에서 퇴직 후, 2009년부터 국립부산국악원 초대예술감독을 맡아 4년 동안 영남지역의 춤을 전수하고 창작하는 일에 몰두했으며, 현재도 부산과 통영을 오가며 후학지도에 여념이 없다. 살면서 운 좋게 만난 이국희, 정순남, 이매방, 한영숙, 김숙자 등 여러 대가로부터 배운 춤을 바탕으로 그의 호(號) 원향(遠香)이란 명칭을 붙여 원향살풀이춤, 수건춤, 진춤, 외손부채춤, 산조춤, 유희삼매무, 긴살풀이춤, 통영기방입춤 등을 발굴, 전승, 보급하고 있다.

조평래 소설가
조평래 소설가

조평래 (소설가)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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