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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당신에게 필요한 ‘No’와 ‘Yes’의 지혜- 황진혁(작가)

기사입력 : 2022-09-22 19:17:52

‘거절’이란 걸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해야 할 거절은 단도직입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해도 별문제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택할 권리’는 거절할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거절해도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거꾸로 말하면 무슨 부탁을 들어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말이 된다.

거절을 잘 못 하는 사람은 거절하면 상대에게 불이익을 받거나 관계가 소원해지는 등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걱정하면서 반대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 부탁만 들어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부탁은 들어주면 상대가 고맙다고 밥을 살 수는 있다. 그런 것도 좋지만 영양가는 덜하지 않은가.

물론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보답을 받자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는 정도의 사이라면 당장 밥 한 끼로 사례받고 마는 것보단 장기적으로 내게 도움 되는 것으로 보답 받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 경우 남의 부탁을 들어주고서 상대방이 밥을 사겠다고 하면 다음에 만나자며 미루는 편이다. 고마워하는 마음만 받으면 그만이지, 굳이 상대방이 밥값으로 돈을 쓰고 서로 시간을 쓰면서 사는 것은 별로 생산적이지 못한 것 같아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상대는 그런 마음 씀씀이에 더욱 고마워하며 주변에 나를 좋은 사람으로 이야기해줄 것이고, 언제라도 신세 갚을 기회를 기다리게 된다. 그렇게 나는 상대와 타인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상대 역시 자연스럽게 은혜를 돌에 새길 줄 아는 좋은 사람이 되어 내게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찾아와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의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삶에선 이렇게 ‘어떤 일’들이 생긴다.

누군가는 말한다. ‘남 도와줘 봐야 하나도 소용없다’라고. 부모님도 늘 하시는 말이긴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상대가 고맙다고 밥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영양가는 없어도 그 정도면 됐지 않은가. 내가 좀 도와준 일 가지고 상대가 언제까지, 얼마나 은혜롭게 생각하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다시 누군가가 말한다. “작가님, 도와줘도 밥 한 끼 안 사고 보답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던데요.”라는. 맞다. 있을 거다. 하지만 좋은 친구 한두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열 명 도와줘서 한두 사람만 내 사람이 되어도 성공한 인생이 아닌가. 스무 명 도와줘서 서너 사람만 내 사람이 되어도 아주 성공한 인생이 아닌가. 거기다 내 도움을 받고 모른척한 사람일지라도 나를 누를 수 있는 위치에 있거나 내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면 그는 최소한 나를 누르지 않을 것이며, 좌지우지하려 들지도 않을 것 아닌가. 이런 삶이 뭘 해도 풀리는 인생이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역설적이게도 큰 보답을 바람으로써 상대에게 서운함을 느껴 관계가 소원해질 수 있고, 큰 보답을 바라지 않음으로써 뜻밖에 더 좋은 보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돌아가서,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거절 좀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이미 ‘No의 지혜’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정도의 스킬(?)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제 다시 ‘Yes의 지혜’도 권해보고 싶다. 사실 세상에서 사람들과 일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정작 ‘Yes의 지혜’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만하면 적당한 부탁이야 들어주며 선심 좀 써도 되는 레벨들 아닐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지혜를 알았다고 할지언정 아직 ‘Yes’를 말할 경지에 오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많은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거절을 못 해서 전전긍긍하거나 거절만 잘하는 사회를 상상하면 어쩐지 스트레스는 가득하고 정은 없는 세상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황진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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