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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21) 국가무형문화재 제73호 가산오광대 보유자 한우성

“탈 많은 인간사 웃고 즐기는 탈놀음, 별 탈 없이 이어갔으면”

기사입력 : 2022-09-30 08:00:54

오광대는 탈놀음이다. 말 많고 탈 많은 인간사, 탈 쓰고 놀다보면 탈 날 일도 별반 없다. 욕도 면상에 대놓고 하면 탈나지만 일단 탈바가지 덮어쓰고 욕하다보면 재미있는 놀이라 생각하여 별 탈 없이 넘어간다. 고을마다 흥타령 하는 이들이 있고, 탈 쓰고 양반 골려먹는 재미에 이골 난 이가 있으며 그래서 하나 되어 심심한 세상 서로 웃고 떠들며 놀며 쉬며 가려했던 것이 소중한 민족문화로 전승되어 온 것이다.

한우성 국가무형문화재 제73호 가산오광대 보유자.
한우성 국가무형문화재 제73호 가산오광대 보유자.

가산오광대는 1980년 11월 17일 국가무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었다. 그 가산오광대를 지켜온 한우성(86) 보유자를 사천시 축동면 가산마을 본가에서 만났다. 선생은 한국 탈놀이 보유자 중 가장 고령이지만 눈빛은 형형하고, 목소리도 쩌렁쩌렁하시다. 1983년 전수 장학생, 1988년 이수자, 1990년 조교, 2007년에 비로소 보유자로 선정되었다. 돌이켜 보면 이 놀이에 투신한 것이 벌써 50년이 되었다고 하니 세월이 빠른 것인지 한 생애가 짧은 것인지 모르겠단다.

조창 있던 사천시 축동면 한씨 집성촌 가산마을
대취락지로 사람 왕래 잦아 자연스레 놀이 태동
길흉화복 비는 천룡제 직후에도 탈 쓰고 놀아

무사태평·부귀공명 기원 춤사위 유일
등장인물 주고받는 대화 많고
뒤풀이까지 다른 오광대와 차별

“요즘 문화재청서 보유자 지정 않아
계승자 없어 명맥 잇기 힘들어
지자체 적극적 지원과 관심 절실”

가산오광대는 조창오광대라고도 한다. 옛날 축동면 가산마을은 인근 8개 군, 현에서 세곡을 받아 중앙에 바치는 조창(漕倉)이 있던 곳이다. 그런 연유로 가산마을은 약 300호의 대취락지로서 큰 시장이 서기도 했다. 가산은 우조창, 마산은 좌조창이 설치되었는데, 이 두 곳 다 오광대가 연행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조창에는 자연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다 보면 심심풀이 놀이가 행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이 마을은 한씨 집성촌으로써 조창 관련 실무를 보기도 했는데, 오광대의 전승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는 점이 중요한 대목이다.

이 놀이는 특이하게도 구전되는 얘기로부터 비롯된다. 옛날 어느 봄날 남강의 지류로부터 궤짝 하나가 표류해 와서 열어보니 탈과 놀이의 대사가 적힌 문서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자연스레 생겨난 놀이인데, 1960년 무렵까지 전승되어오다가 이후 중단된 것을 1971년 동아대학교 강용권 교수가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천 가산오광대 공연 모습.
사천 가산오광대 공연 모습.
사천 가산오광대 공연 모습.
사천 가산오광대 공연 모습.

이 놀이는 축동면 가산리에서 행하는 동제인 천룡제(天龍祭)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천룡제는 정월 초하루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해 당목과 제당에서 당산할매께 제를 지내는 동제로 조선시대 때부터 260년이 넘게 전승되어 왔다. 천룡제 직후인 정월대보름 연희자들은 고사를 지내고 각기 주어진 배역의 탈을 쓰고 조창오광대 깃발을 앞세우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그렇게 시작된 오광대놀이는 가산리의 길흉화복을 비는 놀이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전체 6과장으로 구성돼 있고, 사용되는 가면은 오방신장·영노·양반·말뚝이·문둥이·노장 등 약 37개 정도가 동원된다. 반주악기는 꽹과리·징·북·장구 등의 타악기에 태평소가 함께 연주되며, 장단은 굿거리와 자진모리 장단이 주로 사용되고 춤은 덧뵈기춤이 주가 된다. 등장인물은 영노, 문둥이, 파계를 일삼는 땡중, 할미·영감 등은 다른 오광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유일하게 무사태평과 부귀공명을 기원하는 오방신장무(청제, 백제, 적제, 흑제, 황제) 춤사위가 계승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춤은 황제장군을 중심으로 사방신장이 춤을 추는데 이는 탈춤의 시작을 알리며 놀이판을 정화하는 벽사진경의 의식무이다. 할미·영감 과장에서 다른 탈춤에서는 할미가 죽는데 가산오광대는 영감이 죽는 것이 다른 특징 중의 하나이다.

여타 오광대는 춤극 위주로 구성되지만 이 놀이에선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많다. 이 대사는 1972년 간행된 국어국문학 55-57합병호에 실렸고, 1974년 11월에 서강대학교 민속문화연구회에서 유인한 것이 있으며 한국연극 1977년 1월호와 1995년 7월 한국민속학 27집에 실려 있다. 문제는 그 대사가 고투(옛말)인지라 요즘 젊은 관객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니 고민이 크다고 한다. 고전의 정체성을 살리면서 현대성을 어떻게 적절히 가미할 것인가는 큰 과제이기도 하다.

가산오광대엔 ‘파지굿’ 이라는 뒷풀이 놀이가 있다. 이 역시 다른 오광대와는 확실한 변별성을 갖는 놀이라고 한다. 다른 오광대엔 형식을 갖춘 뒤풀이 놀이가 따로 없는데, 가산오광대엔 이 놀이가 있어 확연한 차이를 나타낸다. 퍽이나 다행한 일은 예전 이 놀이를 하던 어른들은 진작 다 돌아가시고 전승되지 못해 아쉬웠는데 한참 뒤에 그대로 재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산오광대의 예능보유자로는 한계홍(백부), 김오복(집안 매형), 한윤영(집안 어른), 한우은(동생), 한종기(조카)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작고하고 선생만 홀로 남아 있다. 이렇게 모두가 한씨 집안과 관련을 갖는 것을 보면 한씨 집성촌 가산마을에서 태동하여 오늘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사천 가산오광대 공연 모습.
사천 가산오광대 공연 모습.
사천 가산오광대 공연 모습.
사천 가산오광대 공연 모습.

“나야 이제 살만큼 살았고, 이 놀이로 국가가 인정하는 보유자도 되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가 걱정이오. 어찌된 셈인지 요즘은 문화재청에서 새롭게 보유자를 지정해 주지도 않아 계승자가 거의 없는 실정이지요. 예전 상두꾼을 이끌던 으뜸 상쇠처럼 놀이꾼과 관객을 자유자재로 밀고 당길 줄 아는 쟁이를 만나는 것이 어디 수월한 일이겠소? 몇 해 전만 해도 서너 군데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놀이를 가르쳤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이마저도 하지 않으니 명맥 잇는 일이 참으로 힘이 든다오.”

문화재 취재를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지자체의 적극적인 관심과 물질적 도움이다. 특히 전통예술단체는 옛것을 계승하는 일이기 때문에 배우고 익히는 것만큼이나 전수해야 하는 사명감이 따른다. 하긴 안동 하회탈춤은 지자체의 도움으로 상설공연을 하고 있는데 사천시라고 해서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무형문화재위원회 연석회의에서 ‘한국의 탈춤’을 2020년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신청 대상으로 선정했다. 모두가 바라는 대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된다면 우리의 풍자와 해학은 전 세계인이 공감하는 최고의 민속예술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이달균(시인)
이달균(시인)

이달균 (시인)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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