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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22) 진주포구락무 예능보유자 박설자

“천년을 이어온 춤… 진주 고유놀이로 새 천년 잇고파”

1943년 일본서 태어나 광복 후 진주·부산에 살며

기사입력 : 2022-10-07 08:01:56

1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진주포구락무는 연주, 노래, 춤, 놀이가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고려 문종 때 송나라로부터 궁중에 들어와 인기를 누리다 점차 지방의 교방청까지 퍼져나갔다. 긴 시간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궁중형식은 국립국악원을 통해 명맥이 유지되고 있으며, 지방문화재로는 진주포구락무가 유일하게 계승되고 있다.

박설자 진주포구락무 예능보유자가 포구문을 돌며 춤추고 있다.
박설자 진주포구락무 예능보유자가 포구문을 돌며 춤추고 있다.

박설자 진주포구락무 예능보유자는 1943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산청사람이었으나 광복 후 진주에 살게 되자 박설자는 어린 시절을 진주에서 보내게 된다. 중안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여중 3학년 때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 의료시설이 더 좋은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부산에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마침 집 가까이에 무용학원이 있었다. 춤이 너무 좋아 시간만 나면 학원에 살다시피 하며 무용을 했다.

부모님이 다시 진주로 돌아오게 되자 그 후 줄곧 진주에서 살게 된다. 진주로 오자마자 김수악 선생이 운영하는 학원에 가서 전통무용을 배웠고, 김정애 선생이 운영하는 무용학원에서는 승무 북가락을 배웠다. 김정애 선생은 나중에 이리로 가서 거문고 줄풍류로 예능보유자가 되기도 했다. 배우는 게 너무 좋아 정필순 선생에게 학춤과 양반춤을, 정행금 선생에게 가야금과 한량무를, 정금순 선생께는 시조창과 남무(선비춤)을 배웠다.

박설자 진주포구락무 예능보유자.
박설자 진주포구락무 예능보유자.

젊었을 때 몸이 심하게 아프다가도 새로 배울 것이 생기고 배우러 가면 몸이 씻은 듯이 났기도 했다고 말한다. 보존회에서 운영하는 국악학교에서 대금을 배운 것과 강순영 선생께 가야금 병창을 배운 것도 훗날 국악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가야금이 좋아 진주에서 남원 국립민속국악원까지 주 1~2회로 10년 가까이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우리 전통예술에 푹 빠져 있을 시기 친구 소개로 진주 검무예능보유자 성계옥 선생을 만났고, 성계옥 선생 권유로 진주 검무를 배웠다.

진주에서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선양하는 일에 독보적인 역할을 한 운창(芸窓) 성계옥 선생이 진주목사 정현석(1817~1899)이 남긴 〈교방가요(敎坊歌謠)〉와, 그 밖에 〈고려악지〉, 〈악학궤범〉, 〈정재무도홀기〉 등을 참고로 하고, 일제 때 권번에서 최완자씨로부터 검무와 포구락무를 배운 적이 있는 이윤례씨가 당시 생존해 있어 이분들의 고증을 거쳐 진주 포구락무를 복원할 수 있었다.

보존회 회원들이 진주성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보존회 회원들이 진주성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복원된 진주포구락무로 1984년 5월 경남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1985년 9월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한 후, 1991년 경남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받았다.

정금순 선생이 초대 예능보유자가 되어 활동하다 작고하자, 2004년 박설자 선생이 뒤를 이어 예능보유자가 되었고 보존회 회장을 맡아 현재까지 이끌고 있다.

박설자 예능보유자는 “다른 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포구락무는 연주와 춤과 노래가 함께 가기 때문에 장단 박자를 알아야 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수관이나 어린 학생들에게 포구락무를 가르칠 때 장단 박자를 가장 중시하며 장구로 자세를 잡아 준다.

보존회 회원들이 진주교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보존회 회원들이 진주교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보존회 회원들이 진주교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보존회 회원들이 진주교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전통방식의 진주 포구락무 공연은 포구문을 가운데에 두고 무녀 12명, 봉필 2명, 봉화 2명, 창사 2명 총 18명이 나온다. 손에 한삼을 착용한 무녀가 한 편에 6명씩 2편으로 나누어 입장하고, 양쪽 편에 각 봉필 1명과 봉화 1명이 선다. 창사가 부르는 노래에 맞추어 양쪽 6명의 무녀가 짝이 되어 음악에 따라 포구문을 돌면서 한바탕 춤을 춘 후 한삼을 벗어놓고, 다시 춤을 추면서 포구문 위쪽에 있는 풍류안에 수술이 달린 채구(공)를 들고 어르다 던져서 들어가면 축하로 지화자를 합창해 준다. 던진 무녀가 자리에 앉으면 봉화는 준비하고 있던 삼지화 꽃을 머리에 꽂아주고, 못 넣은 편에서는 앉아서 축하 박수를 보낸다. 다음 차례로 한 쌍의 무희가 나와 채구를 들고 어르다 던져서 못 넣으면 봉필이 눈가에 퉁방울을 그려 주는 놀이로 눈가에 그려진 퉁방울이 개구리 짝눈 같기도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음악은 세령산· 타령· 잦은 타령· 향단고주· 경기 굿거리가 주를 이루고, 춤사위로는 평사위· 쌍어리· 절화부· 회수부· 팔수부 등을 춘다. 음악과 춤에 맞추어 손을 뻗으면서 채구를 던져 넣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 들어가지는 않는다.

보존회 회원들이 진주 유등축제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보존회 회원들이 진주 유등축제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끝날 때는 참가한 무녀들이 포구문 주위를 돌면서 창사가 부르는 선비가의 후렴을 받으며 한바탕 어우러져 춤을 추면서 퇴장한다.

악사는 박 1명, 대금 1명,피리 2명, 해금 1명, 장고 2명으로 총 7명으로 이루어지고, 음악이 있어 춤을 추는 이도 보는 이도 아주 흥겹다. 볼꺼리가 없던 시절에 기녀들이 시각적으로 예쁜 옷을 차려 입고 음악에 맞추어 하는 공연이라 인기가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참가 인원은 공연장 사정과 시간에 따라 조정이 된다.

옛날 진주 감영의 주요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춤이었으나, 지금은 연 1회 정기공연과 4월부터 10월 사이에 한 달에 2~3번 진주성 안에서 공연을 하고, 진주시내 학교를 방문해 방과 후 지도를 오랫동안 해 오고 있다.

궁중에서 하던 포구락무와 진주 포구락무의 차이에 대해서 묻자, 궁중에서는 무희들이 궁중복을 입었고, 머리에 화려한 화관을 썼으며, 벌로 받는 먹점을 빰에 그렸지만, 진주 포구락무는 화관이 없고, 평상복을 입으며, 먹점은 눈 주위에 퉁방울을 그린다고 했다. 죽간자는 당악 정재에만 사용했기 때문에 진주 포구락부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궁중 포구락무는 정형화 되어 음악이 매우 느리지만, 진주 포구락무는 서민적이라 음악이 경쾌하며 빠르고 흥겹다고 요약한다.

느린 전통춤으로 격렬하고 빠른 탱고, 자이브, 왈츠와 같은 춤에 익숙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보급에 대해 묻자, 진주시내 대부분의 초등학교에는 공연을 다녀 진주 포구락무를 모르는 학생은 없으며 원형은 보존하되 현장 상황에 맞게 변형된 공연을 하고 있다고 했다. 가령 학생들이 채구를 넣지 못하면 벌칙으로 먹물의 퉁망울 대신 볼에 재미있는 스티커를 붙인다고 한다. 팀원 간의 단합과 성취를 통해 사회성을 키우는 교육적 효과가 있음을 언급했다.

연령과 환경을 참고로 하여 초등학생과 노인들을 위한 신나는 실내놀이로 길을 찾고 있었다.

조평래 소설가
조평래 소설가

조평래 (소설가)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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