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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36년간 교육계 몸담은 허인수 경남교육연수원 원장

“더 큰 변화 꿈꾸며… 교단서 내려와 교육 행정의 길 나서”

1987년 창원 문성고 교사로 교육계 첫발

기사입력 : 2022-11-09 21:03:33

28년간 교직 생활, 8년째 교육 행정에 몸을 담고 있는 경남도교육청 교육연수원 허인수 원장은 퇴임을 3개월여 앞두고 있다. 해를 넘기면 총 36년간 몸담은 교육계를 떠나 이제는 교육계의 원로가 된다.

그는 교사로서, 교육 공무원으로서 경남 교육계의 굵직한 현안들을 마주해 왔다. 허 원장은 미국의 교육학자인 존 듀이의 ‘교육은 과거의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말을 늘 가슴에 새긴다고 했다.

허인수 경남도교육청 교육연수원장이 교육연수원 정원의 표지석인 햇살고운뜰 ‘햇뜰’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김승권 기자/
허인수 경남도교육청 교육연수원장이 교육연수원 정원의 표지석인 햇살고운뜰 ‘햇뜰’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김승권 기자/

◇사학 민주화 운동= 허 원장은 진주에서 초중고를 나왔다. 대아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회장을 맡았다. 그 시기는 부마항쟁이 있던 해였다. 당시 학생회장은 학도 호국단 체제의 연대장으로 칭하기도 했다. 허 원장은 “학도 호국단의 연대장이었던데다 당시 박근혜 영애 한마음 봉사단의 장학금 혜택을 받기도 했다. 사회적으로는 민주화 물결이 요동치는데 마음의 갈등이 컸다”고 회고했다.

그는 창원대 국문학과에 진학해 학보사에서 활동하면서 부마항쟁의 끝자락을 보았고, 5·18을 먼발치에서 묵도했다. 학우들과 함께 군부 정권을 비판하는 학내 신문을 인쇄하기 위해 부산을 찾았지만, 계엄령에 의한 통제는 걸림돌이었다.

그는 “당시 계엄책임자를 설득해 주요 내용이 빠진 채로 검사를 받아 결국 인쇄를 허락받았다. 그 내용이라도 나갔어야 했는데, 결국 출판금지가 떨어져 아무 내용도 찍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쇄기가 있던 지역 언론사를 찾았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당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언론통제로 알 수가 없었던 상황, 신문 출판은 포기해야 했지만, 지역 언론사의 편집국장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은 충격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상을 전하는 편집국장의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허 원장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5·18의 실상은 사회를 보는 관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됐고 언론에 대한 관심도 더욱 커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기자를 직업으로 선택하지는 못했다.

학보사 시절부터 기자가 꿈이었지만, 해군사관학교 1기 출신으로 공무수행 중에 순직하신 증조부의 영향으로 집안에서는 그가 군인이 되기를 바랐다. 또 그의 가슴 한편에는 아버지의 그림자도 늘 자리 잡았다.

허 원장은 “어릴 때 아버지는 매번 부산 보수동의 헌책방 골목에서 책을 사 와 닳도록 읽으셨다. 아버지는 문학이나 어학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고 그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셨다”며 “아버지가 물려준 책으로 공부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창원대 국문과를 졸업해 교직의 길로 들어섰지만 언론 쪽에도 관심의 끈은 놓지 않았다. 특히 지역 언론에는 꾸준한 관심을 가졌다. 한 지역 언론의 창간 주주에도 참여했고 경남신문 독자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87년에 문성고등학교의 국어 교사로 부임, 2014년까지 교직에 몸담았다. 초년 교사 시절을 거치면서 당시 시대상도 혼란스러웠지만, 학내 분위기도 혼란이 이어졌다. 학내에서도 사학비리 등에 대해 민주화 욕구가 분출될 때였고 재단과의 갈등도 극에 달했다. 그는 당시 동료 교사였던 박종훈 교육감이 주도했던 촌지 거부 운동에 동참했고 교과서 채택료 안 받기 등 교육 운동에 함께 앞장섰다. 허 원장과 박 교육감은 교사 시절, 교육 현장에서 개혁을 추진한 동지 사이였다. 박 교육감이 사학 민주화 운동 창원문성고 대표를 맡았을 때 허 원장은 대자보를 쓰는 선전업무를 했다. 촌지 거부 등 교사들의 자정 운동은 점차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사학 민주화의 원동력이 됐다.

허 원장은 감사까지 끌어내며 학내 비리를 척결할 수 있었던 결정적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국정감사가 이뤄지던 도교육청으로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함께 몰려갔다. 주변에는 백골단들이 배치돼 있었고 일부 학생들은 맞기도 했다. 그나마 여소야대 시절이었다. 우리는 밖에서 목소리를 높였고, 이를 들은 국회의원이 국정감사를 중단하고 우리의 호소를 들었다. 국정감사 도중 학교의 문제를 긴급현안으로 다루게 됐고, 이후 결국 재단 비리 해결을 위한 감사로 관선이사가 내려오게 됐다”

그는 사학 민주화 운동뿐만 아니라 교육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마산 지역의 인문계 고등학교가 마산연합이라는 특정 학군으로 묶인 것을 이후 창원 지역으로 확대하게 한 변화도 그에겐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는 “연합고사 200점 만점에 180점 이상이 되면 특정 그룹에 들어가고, 떨어져서 들어가게 되는 나머지 학교는 어깨도 못 펴야 하는 것인가. 학생들 관점에서는 말이 안 되는 것이다”고 말했다. 연합고사 180점을 넘은 아이들만 인정받는 정책은 행복한 정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 원장은 “경쟁에서 최상위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더불어가는 정책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인수 경남도교육청 교육연수원장이 교육연수원 정원의 의자에 앉아 있다./김승권 기자/
허인수 경남도교육청 교육연수원장이 교육연수원 정원의 의자에 앉아 있다./김승권 기자/

그는 당시 동료 교사였던 박 교육감과 도서관 운동의 제도화 등을 위해 같은 길을 걸으며 2004년부터는 (사)경남교육포럼에서도 활동했다. 경남교육포럼은 사회적 합의의 교육공동체로서 교육과 관련해 이견이 있을 때 소통을 통해 합의를 이뤄내는 기구이다. 그는 경남교육포럼의 운영위원, 이사, 상임대표 등을 거치면서 교복 공동구매, 학교폭력 등의 교육 문제를 다뤘다.

허 원장은 지난 2015년 경남도의 일방적인 무상급식 중단 발표 또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는 “교육 현장의 혼란과 극복 과정, 교육적 관점에서 판단하고 집행해야 할 학교급식 문제가 정치적 이유로 왜곡되고, 또 이로 인해 학생과 학부모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가는 상황이 고통스러웠다”며 “급식 또한 교육임을 교육공동체가 배우게 된 소중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외포중 교장과 진주교육장 등을 역임한 허 원장은 지난해 3월 경남교육연수원장으로 부임했다. 허 원장은 부임한 후 연수원 내 장영실홀, 세종홀, 남명, 다산 등 미래형 연수 공간인 에듀테크센터와 스마트워크센터인 공유실을 구축했다. 서남부 지역 교직원들의 연수 편의를 위해 진주 지역에 150명 수용 규모의 서부권 연수원(가칭 남명연수원)도 증축이 진행 중이다.

퇴직을 준비하고 있는 허 원장에게 ‘교육계를 떠나는 길’은 여전히 실감이 나질 않는다.

허 원장은 “36년 동안 교육계에 몸담아 오면서 다양한 직책을 경험했다. 잊을 수 없는 소중한 배움이 있었고, 능력에 비해 과분한 혜택도 있었다”며 “받은 만큼 봉사의 기회가 있으면 외면하지 않겠지만 우선은 스포츠클라이밍에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경남 교육에 대해 “지식의 대량 전달·생산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 교육은 디지털 네트워크로 무장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원해야 한다”며 “학교의 담장을 넘어 사고하고, 학습자가 살아갈 미래의 관점에서 교육해야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김용훈 기자 yh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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