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작가칼럼] 자연스러운 모순- 이철웅(시인)

기사입력 : 2023-01-26 19:33:43

감사하게도 매년 나의 새해 계획을 물어봐 주는 사람이 있다. 그 물음에 보답하기 위해 그럴싸한 계획을 말하곤 했는데, 올해는 미니멀리스트가 될 거란 말을 했다. 덥석 말해버린 급조된 말 뒤로 느껴지는 소소한 죄책감은 덤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남에게 보여주는 계획은 있지만, 나만의 진정한 계획은 매년 존재하지 않았다. 자칫 의욕 없는 사람처럼 비칠까봐 없던 계획을 애써 입에 올리지만, 그것보다 버거웠던 건, 계획으로 점철된 매일의 근면함에서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없던 것이다.

만약 삶이 목차처럼 정리될 수 있으면 대단원만으로 나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중간 챕터, 수많은 소제목 그리고 그 안에 수많은 각주들……. 그것들은 간단해질 필요가 있어보였다.

처음으로 ‘명료’해지길 원했던 건, 첫 직장을 그만둔 20대 후반의 어느 날이었다. 일을 하지 않는 나는 너무나도 복잡한 존재였다. 수많은 가능성 아래, 꽃을 채 피워내지 못 한 상태라 더 그랬다. 그때 무렵 최소한의 살림으로 살아가는 삶의 형태인 미니멀리즘(최소주의)이 눈에 들어왔다. 잴 것 없이 바로 실행했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분리수거를 해가며 정리했다. 가구와 옷가지 그리고 잡동사니들이 사라졌다.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넓어진 공간이었다. 빈 공간이 심적인 충만함으로 채워지리란 생각에 들뜨기마저 했다.

그러나 계절이 바뀔 때쯤이었다. 남겨진 두 벌의 옷과 허전한 공간만으로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건 쉽지 않았다. 월세를 내기 위해 주말엔 육체노동을 하러 다녔는데,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노곤한 몸이 마음을 꺾었다. 잠시 쉬려고 누운 바닥은 나를 잠들게 했고 그렇게 세탁하지 못 한 옷을 그다음 날에도 그대로 입고 집을 나서게 됐다.

미니멀리즘은 옷 쉰내를 이기지 못하고 멈추게 됐다. 몇 개월가량의 짧은 변화였지만, 나름의 보람을 느끼려는 찰나, 그만두게 돼 아쉬움이 밀려왔다.

분명 새로운 삶의 형태는 핑계보다는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지만, 그 변화에 적합한 여건이 있었을 것이다. 각 개인의 경험을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사람은 얼마든지 구차해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너무나도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손은 하얗지만 고생 한 번 안 해봤단 말은 싫어하고,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게으르고 깨끗한 옷을 입고 싶어했다. 나의 숨겨진 진짜 이름은 ‘생모순’이 아닐까.

일련의 미니멀리즘 소동을 겪은 뒤 나는 천천히 예전 살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비워진 공간은 다치 채워졌으며, 옷가지들은 늘어났다. 거절하던 모임들도 하나 둘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모임에서 가장 큰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웃어가며, 사람들과 어울렸는데 그 순간 나는 제일 ‘자연’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됐다.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자 ‘노자’는 꾸밈없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는 것인 ‘무위자연’을 말했다. 이것은 나태함을 말하는 것이 아닌, 주체적인 삶에 대해 자신의 위치와 능력에 맞게 임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나는 내 나름의 자리에서 웃고 있었기에, 잠시나마 ‘자연스러운 모순’이 될 수 있었다.

계획을 하든 하지 않든, 모두 부지불식간에 어울리는 형태로 다가올 일이다. 기대와 두려움 모두 좋으니 조금 더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좋겠다.

이철웅(시인)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