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77세 라상호 사진가의 꿈의 여정 ② 여행의 시작과 세상의 끝

50년 지기와 함께한 남극 정취… 그저 행복했다

기사입력 : 2023-03-07 11:15:10
남극의 최고점 파라다이스 베이 빙하지대.
남극의 최고점 파라다이스 베이 빙하지대.

2월20일 밤하늘엔 별이 총총히 맑고, 따스함이 온몸을 감싸도는 새벽 3시, 마산을 떠나 인천공항 제1터미널에서 LA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네팔여행 이후 4년여만의 나들이인 것 같다. 정겨운 이웃의 염려와 격려는 내게 큰 힘이 되었고 나를 더욱 진실하게 한다. 이제는 나의 다섯 번째 꿈을 완벽하게 이루고 싶다. LA에 살고 있는 나의 50년지기 오랜 벗과 함께 남극으로 떠날 것이다. ‘Fin del Mundo’. 세상의 끝이라는 우수아이아의 빙하지대를 남길 것이다. 잉크빛 같이 푸르고 맑은 바다세상을 떠돌아 사는 빙하의 세상은 어떠할까?

남극의 최고점 파라다이스 베이 빙하지대.
남극의 최고점 파라다이스 베이 빙하지대.

2월24일 정신없이 지나간 몇일, 크루즈를 타고 항해 첫날 새벽, 폭풍같은 바람을 뚫고 11층 갑판에 나서니 무지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해 가슴이 요동쳤다. 그러나 이내 사라졌다. 못내 아쉬운 것은 내 욕망이 끝이 없다는 것일까. 무지개 이야기를 하니 몇 일 전 LA에서 만나 길동무가 되어주신 노박사님이 떠오른다. 1941년생으로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시절 영자신문을 배달하며 영어를 독학한 그는 보건소에서 의무 근무를 하던 중 미국병원에 의사로 취업하게 됐다고 했다. 나의 꿈이 세계유산 사진집을 펴내는 것이라면, 그의 꿈은 ‘잊을 수 없는 환자’를 집필하는 것. 꿈을 공유한 그는 캘리포니아를 떠나는 날 을씨년스럽고 소나기가 몇 차례씩 퍼붓는 변덕스러운 날씨를 탓하는 내게 한 마디 건넸다.

“라 선생, 캘리포니아는 비가 적은 곳인데, 라 선생을 반기는 비인 것 같습니다.”

잠시후 비가 멈춘 도시 한가운데 굉장히 큰 무지개가 떠오르자 말을 이었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무지개까지 반기네요!”

감동적인 이 메시지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라상호 사진가의 50년 지기 박승원(가운데)씨와 동행들.
라상호 사진가의 50년 지기 박승원(가운데)씨와 동행들.
남극 크루즈 ‘셀러브리티 인피니티호’ 내부.
남극 크루즈 ‘셀러브리티 인피니티호’ 내부.

2월27일 망망대해 셀러브리티 인피니티(CELEBRITY INFINITY)호는 짙푸른 바다를 가르며 전진한다. 오늘은 이 크루즈의 선장을 만났다. 온화한 미소를 띤 소년 같은 분이다. 언제나 그의 두 볼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세상 큰 바다를 주름잡고 나아가는 힘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온 세상 사람들이 미지의 세계인 남극을 찾아오는데, 그들을 대하는 당신의 철학은 무엇이냐 물었다. ‘세계 전부를 위한 서비스’라는 답이 돌아온다. 승선인원 2593명, 9만1000톤 대형크루즈, 대형 공연장, 갤러리, 산해진미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과 면세점까지 갖춘 화려하고 풍요로운 곳에서 언뜻 나는 이방인 같음을 느낀다.

남극 크루즈 ‘셀러브리티 인피니티호’ 내부.
남극 크루즈 ‘셀러브리티 인피니티호’ 내부.

2월28일 정말 우연일까. 내 마지막 꿈의 여정 일부에 동행하고 있는 50년지기 친구 박승원이 1968~9년때 경남신문 박두석 사장 시절, 경남신문 서울분실 사진기자로 근무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는 그를 한참 후인 1978년경 사진인으로 만나 지냈는데 말이다. 그는 지금 미국 캘리포니아 숲속마을 라구나우드 빌리지에서 사진가로 자기영역을 지키며 ‘메라사진연구반’을 지도하고 있다. 이번 남극행에는 ‘메라’ 멤버인 두 분도 함께 한다.

경남신문에 몸담았던 벗과 함께 꿈의 여정 일부를 이루며, 이 여정을 경남신문에 기고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여기보다 시간이 앞설 대한민국, 지금쯤 3월 1일일 것이다. 우리 지역의 보배, 경남신문 창간 77주년을 축하하며, 앞으로의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3월1일 ‘Fin del Mundo’ 지구의 끝, 우수아이아가 그 곳이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갑판 위에 일렁이다 비바람이 멎는 듯한다. 그 사이로 조용한 아침 항구가 보인다. 맑은 날이 그리 적다는 이곳에 어느새 구름이 춤을 추며 물러간다. 웬 횡재일까! 기분이 좋은 날이다. 먼 산엔 만년설이 자리하고 작은 섬은 하얀 파도를 넘는다. 산자락 아래에 자리한 시가지는 수채화 같은 풍경이다. 항구에서 시가지를 오르는 언덕길이 마냥 친근하고 모자이크와 같은 채색이 기쁨을 준다. 제일 먼저 고풍스런 시청사를 지나 두 블록 거리에 위치한 ‘RAMOS GENEERALLS’를 찾았다. 120년 전 1907년에 생겨난 카페. 출입문의 묵직함과 깊은 색으로 덮인 벽의 정취, 콜릿이 유화마냥 풀리는 이곳만의 라떼가 전통을 이야기 한다. 맛의 음미조차 미루고 한 세기의 역사를 이곳저곳 기록해본다. 숨은 보물 찾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라상호 사진가가 빙하지대를 촬영하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라상호 사진가가 빙하지대를 촬영하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남극의 최고점 파라다이스 베이 빙하지대.
남극의 최고점 파라다이스 베이 빙하지대.
남극의 최고점 파라다이스 베이 빙하지대.
남극의 최고점 파라다이스 베이 빙하지대.

3월2일 밤새도록 달려 새벽녘이 됐다. 고래가 함께 수영하는 걸 보기도 했다. 오후 3시경엔 꿈에 그리던 빙하지역에 닿는다는데, 하늘에 뜬 먹구름 때문에 조금은 불안하다. 기다릴 것이다. 이제껏 기다림의 미학을 익혀왔지 않는가? 그러나 검푸른 하늘은 노해 있고, 매서운 추위도 함께다. 구름사이로 빛내림이 시작되더니 비가 그쳤다. 먼 수평선 위 작은 바위섬이 눈에 들어온다. 이 격랑을 조용히 지켜보는 모습이 어여쁘다.

실내 가득 바이올린과 첼로의 음률이 가득찼다. 바이올린 연주자의 표정과, G선상의 아리아가 나를 멈추게 한다. 아직도 우리는 망망대해 속이다. 내일쯤에야 빙하지대에 들어설 것이라는 선내 방송이 나온다. 내일을 위해 기도한다. 행복한 날을 베푸소서.

남극의 최고점 파라다이스 베이 빙하지대.
남극의 최고점 파라다이스 베이 빙하지대.

3월3일 드디어 남극이다. 새벽 6시께 SCHOLLAERT CHANNEL에 들어섰다. 하늘이 조금씩 개어오고 양옆으로 빙산들이 우리를 둘러싼다. 그리고 서서히 남극의 정취에 머문다. 바람은 두 볼을 때리고 두 손은 꽁꽁 얼음처럼 얼었다. 체감온도는 영하 몇 도쯤 될는지. 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내 작업은 계속됐다. 갑판은 설렘이 가득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남극의 최고점인 PARADISE BAY에 도달했다. 크고 작은 유빙이 흐른다. 그렇게 자연은 순리대로 갈 길을 가는가보다. 신비로운 세상, 천지를 만들어낸 창조주의 위대함이다. 새벽 6시부터 점심도 거른 채 12시간 이상을 유빙과 함께 했다. 그저 행복했다.

라상호 사진가.
라상호 사진가.

창동예술촌 입주작가·창동갤러리 관장

정리= 이슬기 기자 good@knnews.co.kr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슬기 기자의 다른 기사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