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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981) 형평천하(衡平天下)

- 온 세상을 저울대처럼 공평하게 만든다

기사입력 : 2023-05-23 08:00:09
동방한학연구원장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며 인권을 보장받고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본능적으로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절제하지 않으면 남을 침략하고 굴복시키려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 사는 세상에는 계급이 존재하고 투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직업에 따른 신분 차별인 사(士 : 지식인), 농(農 : 농민), 공(工 : 기술자), 상(商 : 장사)이라는 구분이 있었고, 또 신분에 따른 양반, 기술직에 종사하는 중인(中人), 일반 평민에 해당되는 상민(常民), 남의 부림을 당하는 천민(賤民)으로 구분하게 됐다.

천민 가운데서도 가장 천대받던 계층이 백정(白丁)이었다. 백정이라는 말은 본래 중국에서는 벼슬 없는 평민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와서는 가장 비천한 도살업에 종사하는 사람, 버들가지를 가지고 고리짝 등 도구 만드는 사람을 지칭하게 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모든 신분을 철폐한다’고 법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백정이 그대로 존재했다.

필자가 여섯 살인 1957년도에 우리 동네 동제(洞祭) 때 소를 잡기 위해서 백정을 불러온 적이 있었다. 그해 우리 선친이 동제를 주관해서 우리 집에 그 백정이 와서 지냈다. 검은 두루막을 입었는데 옷고름 없이 단추로 잠갔고, 검은 벙거지를 눌러 쓰고, 남의 집 축담 위로 올라가지 못 하고, 마당에 멍석을 깔고 밥을 먹었다. 사람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모든 사람에게 경어를 썼다. 조그만 망치와 칼 등 몇 가지 연장이 든 통을 들고 다녔다. 산속으로 소를 몰고 가서 금방 잡아서 갈라 통에 담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섞여 살지 못하고, 먼 산 중턱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때만 해도 다른 데 이사 가서는 살 방도가 없으니, 시골마을 저 마을에서 부르면 가서 도살해 주고 조금씩 수고료를 받아 연명해 갔다.

1923년 진주(晋州)를 중심으로 형평운동(衡平運動)이 일어났다. 백정들도 평등하게 사람 대접해 달라는 주장이었다. 벌써 백정 가운데서 유학까지 갔다온 사람도 있었고, 시장에 고깃집을 차려 큰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인권에 눈을 떴던 것이다. 또 양반 출신 가운데서도 선각자적인 사람도 참여했다.

형평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백정의 해방운동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존엄성 평등을 추구하는 운동이 되고, 더 나아가 민족해방운동까지 갔다. 그러나 내부 분열 등으로 1935년에 이르러 대동사(大同社)로 이름을 바꾸면서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993년 형평운동 70주년을 맞이하여 형평사업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기념탑 건립, 국제학술대회 등을 개최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올해가 100주년이고, 지난 4월 25일 기념식을 거행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많이 줄어들었다. 차별과 투쟁이 없는 온 세상이 공평하게 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

* 衡 : 저울대 형. * 平 : 공평할 평.

* 天 : 하늘 천. * 下 : 아래 하.

허권수 동방한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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