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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예술인을 담다] (12) ‘오랜 공부로 진해진 지필묵’ 이병남 서예가

서예인생 40년… 공부하며 깨치는 필묵의 깊은 맛

기사입력 : 2023-09-18 20:40:40

형편 어려워 고교 졸업 후 공단 취업
책 한 권에 감명 받아 서예인의 길로

1994년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
3년 뒤 마흔에 대학 입학 고전연구

지역의 전통·역사 공부해 작품 전시
경남서총 회장 맡아 서예 진흥 노력

경남서예사 조명하고 해외전시 준비
“교육 통해 서예문화 꾸준히 이어가야”


까만 먹을 머금은 붓이 길을 낸다. 문자 형상 그대로의 ‘길’이기도 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며 걸어가야 할 역경과 희로애락이 드러난 ‘길’이기도 하다. 서예가로 살아온 40년 내내 문자가 품고 있는 자형의 미학이 선으로 드러낼 수 있는 기법을 연마해 온 이병남 작가가 ‘서예’를 말한다.

오랜 기간 서예 작가로 활동하던 그가 어느새 경남 서예인들을 대표하게 됐다. 최근 경남 서예 단체를 총망라하는 경남서예총연합회(이하 경남서총)의 회장이 되면서다. 경남서총은 한국서예협회·한국미술협회(서예분과)·한국서가협회·한국서도협회의 연합 단체로 지난 2020년 8월 창립하여 현재까지 300여명의 회원이 있다.

이 작가는 서예인들 사이에서 ‘외유내강’형으로 불린다.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결단이 필요할 때 강하게 이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 작가의 일대기를 듣노라면 아래로 끌어내린 붓 선처럼 과감한 결정들이 눈에 뜨인다. 한 권의 책으로 인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서예가의 길로 직진한 그의 청년시절과 같은 과거들 말이다.

이병남 서예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붓을 들고 ‘경남신문’을 쓴 후 활짝 웃어 보이고 있다.
이병남 서예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붓을 들고 ‘경남신문’을 쓴 후 활짝 웃어 보이고 있다.

◇공단 청년이 서예인이 되기까지= 전북 진안에서 태어난 이병남 작가의 어린 시절엔 주변 형들이 학교 대신 서당을 다녔다. 붓과 먹의 첫 기억은 그때부터다. 초·중등 시절 그 또한 붓을 잡을 일이 많았으나 취미에 그쳤다. 당시에는 어려운 집안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경남의 한 직장에 취업했다.

일은 고됐다. 업무를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와 자기 전에 꼭 책을 읽었는데, 그때 접한 책의 한 구절이 이 작가의 삶을 바꿔놓았다. ‘긍정적인 사고’의 창시자인 노만 빈센트 필이 쓴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책에서다.

“당신이 당신의 직업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좋아하는 일을 1부터 10까지 써보라는 구절이 있었어요. 곧바로 2m 길이의 광목에다가 그 리스트를 쭉 적어 보니 제일 자신 있고 좋아하는 게 글씨더라고요. 이 길을 가야겠다. 그때 정했죠.” 그 길로 1980년부터 마산 3·15 탑 앞에 있던 ‘죽포서실’을 다녔다. 일과 서예를 병행하던 그는 특례보충역이 끝나면서 본격적인 서예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작가는 1994년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 작가가 되면서 필묵의 수려함을 전국에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서예의 ‘깊은 맛’을 터득하기 위해 1997년 마흔 살의 나이에 계명대학교 예술대학원에 입학해 문자에 대한 고전미와 서(書) 예술의 학문을 새롭게 공부하게 됐다. 이때 조선후기 한글의 다양한 서간문과 필사본을 접하면서 고전연구에 빠져들게 되었다. 문자에 숨을 불어넣는 과정은 단지 ‘수려한 붓질’과 ‘고전의 이해’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필선과 자형의 변화, 묵의 농담과 여백의 미, 부단한 박섭(博涉)의 수련 과정을 통해 생각의 깊이를 채워가며 완성된다. 그렇기에 이 작가에게 서예란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붓을 잡고 또 연구하면서 이제는 자신의 철학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서예가는 생명이 없는 지필묵(紙筆墨)의 재료를 나의 모습으로 인격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죠.”

이병남 서예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붓을 들고 '경남신문'을 쓰고 있다.
이병남 서예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붓을 들고 '경남신문'을 쓰고 있다.

◇경남 서예의 가치가 빛을 발할 때까지 누대정재(樓臺亭齋)= 이 작가의 작품활동에 지역성을 뺄 수 없다. 지난 2013년에는 창원 지역에 있는 누·대·정과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서예로 풀어낸 ‘창원 누대정재(樓臺亭齋) 탐미전’은 창원지역 누대정을 주제로 만든 서예 작품 전시였다. 작가 자신도 자기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전시이기도 하다. 경남의 작가로서 지역의 전통과 역사를 이해하고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경남 서예인들의 대표가 된 지금은 경남 서예인들이 바라는 바를 잘 알기에 경남서예 진흥의 막중한 책무에 어깨가 무겁다.

경남서예사를 조명해 지역 서예가와 주민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그 가치를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까지도 전파하는 것이 목표가 됐다. 이를 위해 이 작가는 경남서총을 통해 경남서예사 정립을 위한 선대의 유묵 전과 그와 관련한 세미나, 회원전 등은 계속 진행할 것이며, 내년에는 국내 유명작가 100인을 선정해 행사의 규모를 키울 예정이다. ‘경남 서예’의 국외 전파를 위해 내년 3월에는 회원들의 해외 전시도 계획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경남서예 100년사’를 정립하려는 준비도 계획하고 있다.

“경남은 한국 서예사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시, 서의 자취와 호국정신을 기리는 세계 현존 최고의 팔만대장경과 정신문화의 뿌리가 되는 남명 조식 선생의 사상 그리고 한반도의 문자 역사를 알리는 다호리 붓이 발견된 곳이 경남이기 때문이지요.” 지난 2020년에는 ‘경남 서예진흥에 관한 조례’도 제정됐다. 그는 조례가 만들어진 만큼 경남 서예 문화가 전국 으뜸이 될 수 있도록 지자체의 통 큰 지원으로 ‘경남 서예 비엔날레’ 같은 행사가 있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지금도 평생교육원이나 문화센터에 서예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결국엔 ‘젊은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서예 문화도 유지하기 힘듭니다. 서예진흥 조례가 있는 만큼 우선적으로 경남지역 각 대학에 서예동아리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강사를 파견하고, 초중고별 특성을 고려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전문인력 양성 등 적극적인 지원대책이 필요할 때죠.”

글·사진= 어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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