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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동백꽃 만다라를 꿈꾸다- 조경숙(수필가)

기사입력 : 2024-02-15 19:39:42

백 편의 들꽃 만다라를 완성하였다. 늦은 여름부터 초겨울까지 집 주변에 자생한 들꽃으로 재료를 얻었다. 마당에 피고 지던 달개비며 손만 대면 녹아버리는 물봉숭아까지 풀꽃은 무엇이든지 재료가 되었다.

만다라는 한편 한편마다 만월(滿月)의 충만함과 희열을 안겼다. 달이 차면 기울 듯 백 편의 들꽃 만다라가 완성된 후 달이 지고 난 자리처럼 공허했다.

허한 마음자리를 채우려 지심도로 향했다. 반복되는 일상의 틀을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서였다. 가끔은 이율배반적인 것도 사람의 마음이리라. 꽃을 볼 것이라 기대는 없었지만 섬이 가까워질수록 꽃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으로 변했다. 좁은 매표소 창구를 들여다보며 꽃이 피었는지 묻고 또 묻는다. “혼자예요?” 묻던 안내원은 재수가 좋으면 동백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뱃머리에 부딪히는 바닷바람이 매서워 옷깃을 세우며 객실에 앉았다. 낮은 물살에 일렁이는 배는 나를 메트로놈 기계처럼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게 했다. 어깨를 마주 기댄 연인의 눈빛은 햇살에 비친 물빛처럼 반짝인다. 몇 명 되지 않는 여행객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작은 항구를 밀어내고 동백의 영토에 발을 딛게 한다. 때로는 익숙함에서 멀어져보는 것도 나를 돌아보게 한다. 사람 사이에도 간격이 필요하듯 좋아하는 것도 가끔은 멀리 두고 봐야 하는 것일까. 무엇인가 묵직한 어깨의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

첫발을 내딛는 섬은 물결 같은 파동을 일으키며 가슴으로 안기는 듯하다. 미세한 진동이 전해져 온다. 예기치 않은 걸음은 나만의 왕궁으로 들어가게 하는 듯 짜릿한 기쁨을 안겨준다. 기다림에 익숙한 듯 선착장에 있는 인어상이 외롭기만 하다. 어색한 웃음으로 ‘안녕’이란 말을 건네며 비탈진 언덕길을 오른다. 동백나무 숲길은 고향 길 같고 엄마의 품처럼 포근하다. 한참을 가다 숨고르기를 하며 되돌아본다. 내가 살아온 길도 저렇게 포근하고 따뜻했으면 좋으련만. 수령조차 가늠할 수 없는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며 이어진 길이다.

섬 곳곳에는 일본군 헌병대 분주소와 탄약고, 전등소장 관사 등 일제가 남긴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상흔의 기억까지 보듬고 사는 것 같아 씁쓸함은 입술을 깨물게 한다. 토닥토닥 보폭 좁은 발걸음으로 섬의 정수리까지 걸었지만 동백꽃 몽우리조차 볼 수 없다. 화엄의 세계를 이루던 그 순간을 늘 지나치며 살아온 걸까. 동백은 온통 짙은 초록빛 이파리만 무성하여 하늘빛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동백나무 숲길을 지난 조붓한 길에는 대숲이 이어진다. 멀리서 달려온 바람은 근육질로 단련되었을까. 비릿한 바다 냄새가 물씬 나를 훑고 지나간다. 돌아오는 길, 선착장이 가까운 민박집 울타리에 만개한 동백꽃이 활짝 웃으며 나를 반긴다. 동백은 묵묵히 찬 겨울 숲을 지키며 오직 일심으로 피고 진다. 무채색 겨울 빛에 강인한 생명을 불어넣는 아릿한 핏빛이다.

다시 또 동백꽃 만다라를 꿈꾸며 청량한 동박새 울음소리까지 가슴에 품는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했던가. 무엇이든지 때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혼자 찾아온 지심도에서 철 이른 동백꽃을 만나니 재수가 참 좋은 날이다.

조경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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