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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고통이 건강해야 삶이 건강하다- 김경복(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기사입력 : 2024-02-28 19:24:07

삶이 건강하면 죽음도 건강하다. 죽음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리고 죽음이란 현상을 절대 피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이와 같은 명제는 위안이 되면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죽음만큼 평등한 것이 있을까? 이 우주의 모든 생명체, 아니 생명체를 떠나 무기물도 생로병사를 겪는다. 사는 동안 삶의 질이나 형태가 다를지 몰라도 누구나 그 무엇이라도 죽음을 맞게 된다. 죽음이라는 관문이 있으므로 삶의 특성이 규정되고, 삶의 자세 또한 결정된다.

그렇기에 죽음이라는 현상을 전제로 하여 자신의 실존적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죽음에 대한 제 나름의 규정에 의해 어떤 사람은 막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시나브로 삶의 질을 높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윤회사상을 믿는 사람은 현생의 삶을 막 살지는 않을 것이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도 보다 지고한 가치가 있는 삶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럴 때 죽음이 삶의 과정 속으로 편입된다. 다시 말해 삶이 건강하면 죽음도 건강하게 될 것이란 믿음이 작동하게 된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저 ‘죽음’이란 현상과 실체를 현세의 삶 속에 구체화함으로써 실존적 삶의 의미를 획득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는 대표적 문화행위가 종교다. 더 확대 적용하면 예술이다. 그것들은 현존의 삶을 무의미하게 흘러가지 않도록 방향타를 세워주고, 삶의 무상함에 허무로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안전판을 깔아준다. 그렇기에 하나의 종교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나, 하나의 예술혼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생애는 그렇게 삭막하지 않다. 오히려 이 무의미하고 무정형의 세계에서 하나의 의미나 질서 있는 아름다움을, 존재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낼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죽음’이 삶으로 하여금 이 허무의 세계를 가치와 미의 세계로 승화시키게끔 추동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역설적으로 ‘죽음이 건강하면 삶이 건강하다’로 바꾸어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것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사느냐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죽음의 의미를 현실에서 실감으로 느껴보긴 어렵다. 그렇다고 비근한 것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죽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우리는 ‘고통’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역설적 경구를 만든다면, ‘고통이 건강하면 삶도 건강하다’는 말을 얻을 수 있다. 이 명제가 왜 의미가 있는가 하느냐는 당대의 문화적 형태에서 그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비자본주의 사회는 사회 전반에 고통의 현상이나 가치를, 즉 동일한 관점에서 죽음의 흔적이나 의미를 희석시키고 배제해버리려고 한다. 생명을 도구적 존재로만 보려는 자본의 논리가 죽음과 고통의 의미를 탈색시켜버리고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생명적 가치를 존중하는 입장이라면 이런 문화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현실 속의 고통에 대해서라도 그 가치와 의미에 대해 반성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사람의 삶과 사회의 관계에서 고통도 피할 수 없다. 이 고통을 어떻게 보고 다루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과 사회적 건강이 결정된다. 때문에 고통은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실존을 느낄 수 있고, 사회적 관계성을 성찰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고통은 존재론적 측면에서나 사회역사적 측면에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기피하거나 배척할 대상은 아니다. 어떻게 당대 문화현실에서 이 고통의 내용과 형식을 수용하고 정립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고통이 건강해야 개인과 사회적 삶 모두가 건강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때인 것이다.

김경복(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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