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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온화(穩和)한 자리- 김태경(동화작가)

기사입력 : 2024-03-14 19:37:16

매끈한 승용차는 초라한 시골집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 차를 타면 신세계로 나아갈 것 같았다. 신세계는 어린아이에게 달콤하고 짜릿한 시간을 선사했다. 잠깐의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 마당 한편에서 빨래하는 엄마를 멀찍이 서서 바라보았다. 투박한 옷차림의 엄마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조각 중 유난히 기억에 남아있는 한 조각이 있다. 사촌의 집에 머물다 돌아온 날, 낯설게 느껴진 엄마. 내가 있는 이곳이 무채색처럼 재미없게 느껴진 그 순간.

여름이면 부산에 사는 사촌들이 놀러 왔다. 삼촌은 택시 기사였고, 그 당시 시골에서 보기 힘든 흰색 승용차는 마당 앞을 당당히 차지했다. 사촌들이 떠나는 날, 나는 비좁은 승용차의 뒷좌석에 기어코 한자리를 차지했다. 빼곡한 건물과 줄지은 자동차들이 있는 도시는 나에게 환상의 공간이었다. 삼촌이 퇴근 후 사온 크림 빵은 황홀했고, 사촌들이 가진 필통과 공책은 반짝이는 보석처럼 귀해 보였다.

울퉁불퉁 흙길을 한참 달려야 도착하는 우리 집. 궁벽한 그곳을 탈출하는 방법은 비좁은 뒷좌석에 몸을 싣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환상은 어느 순간 막을 내렸다. 나는 성장했고 여름마다 사촌들이 더는 놀러 오지 않았다.

어른이 된 나는 도시의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시간은 흘러갔지만, 나는 멈춘 것 같았다. 돌아오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는 다시 돌아왔다. 나만의 온화한 이 자리로 말이다.

어른이 되어서야 나의 어린 시절이 특별했음을 알았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 아님을 알았다. 계절과 동화되어 살았던 시간이 지금은 꿈처럼 그립다. 나의 놀이터는 산과 강이었고, 통제가 없는 자유 속에서 마음껏 놀고 또 놀았다. 뒷산 깊숙한 곳은 모험이 가득한 미지의 세계였다. 계곡에서 가재를 보았고, 컴컴한 동굴 앞을 호기심으로 서성거렸다. 그 시절에 마주할 수 있었던 자연의 무대는 이제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남편과 잠시 떠나는 도시 여행은 늘 숨 가쁘기만 했다. 건물과 사람. 자동차와 불빛. 여유로울 시간이 없었다. 속도에 떠밀려 목적지에서 목적지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이방인이 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우리는 도시 체질이 아니라는 가벼운 농담은 진실에 가까웠다. 그곳에서 나는 사유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회귀 본능은 나를 다시 이곳으로 이끌었다. 나의 온화한 자리는 늘 같은 곳이었다.

작대기로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를 재잘거리던 어린아이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습작을 시작한 나는 자연스레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글을 써 내려갔다. 나에게 익숙한 것이 글을 쓰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 힘이 없었다면 작가라는 정체성을 붙잡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쏟아지는 별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겨울에는 함박눈을 멍하니 바라보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나는 이곳에서 다시 별을 보고 함박눈을 기다리고 있다. 온화(穩和)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자리에서 인간의 깊이를 헤아리며 살아가고 싶다.

다른 이들의 삶에도 온화한 자리가 하나쯤 있기를, 오롯이 나로서 진득하게 살아내며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있기를 바란다.

김태경(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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