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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봄의 마음들-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기사입력 : 2024-03-18 19:29:24

나는 아직도 ‘떠난 것들은 꼭 돌아온다’라는 믿음으로 산다. 그래서일까? 나도 낙향하여 10년 넘게 기차역과 시내버스 종점이 있는 역전 마을에 살고 있다. 유년을 철둑 근처에 살았던 나에게 기차 소리는 언제나 가슴 설레고 정겹다. 늦은 귀갓길에 하루 일을 마치고 줄지어 쉬고 있는 버스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푸근해 온다. 역과 종점은 다시 기점이라는 사실을 매일 느끼며 산다. 오늘은 이처럼 돌아오는 봄의 마음 몇 가지를 천천히 읽어보자.

1. 엘리베이터

겨울비가 자주 온다. 오래전부터 젖은 거리를 천천히 걸어서 귀가한다. 여기저기 기울어진 우산들이 방향을 잃고 헤매지만, 저마다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다. 돌아오는 모습을 기다리는 희미한 불빛들도 흔들리지만, 무게 중심을 잘 잡고 있다. 마지막 관문처럼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우리집은 15층 아파트의 8층이다. 밤의 엘리베이터는 빨리 오르는 게 목적이다. 아침에는 서둘러 내려오는 것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자주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밤에는 꼭대기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있으면 은근히 부아가 난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나 자신이 더 허파 뒤집어질 일이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래서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 조그맣게 ‘밤에 이용하시는 주민은 내리시면서 1층 버튼을 살짝 눌러주세요’라고 전단지를 붙여볼지 자주 생각했다. 오늘도 여전히 저 먼 꼭대기 층의 숫자가 빨갛게 눈을 켜고 있다. 접은 우산을 지팡이 삼아 비틀거리다 드디어 작정한다. 집에 가자마자 바로 유성매직을 찾으리라. 나는 내리면서 곧바로 1층 버튼을 누른다. 다음 날 내려올 때, 엘리베이터 안은 여전히 깨끗하다. 소심한 나의 결심은 아침이면 늘 까먹는다. 아니, 까먹고 싶어 할지도 모를 일이다.

2. 깻잎

집에 오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이 앞 베란다 왼쪽 구석 자리다. 딸아이가 놓고 간 의자에 앉아 대구부산 간 고속도로 위의 차들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딘가로 돌아가는 차의 후미등은 검붉게 번쩍인다. 그 고속도로 다리 밑에는 깻잎을 키우는 비닐하우스가 10동 정도 있다. 낮에는 무심코 지나지만, 해가 지면 비닐하우스는 화려한 조명으로 눈이 부실 정도다. 불야성이다. 깻잎은 단일성 식물로 하루 중 어두운 시간이 8시간을 넘기면, 종족 번식을 위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깻잎은 말 그대로 잎을 생산하기 때문에, 꽃 피는 것을 막기 위해 억지로 전깃불로 밝게 유지하는 것이다. 일명 전조재배라 한다. 알고 나니 어쩐지 참 슬프다. 평생 꽃 한번 피우지 못하고, 실컷 잠 한번 자지 못하고, 톡 끊기는 운명이라니! 그래서 깻잎 한쪽 면이 까칠까칠한 것일까. 오늘밤에는 몰래 내려가서 두꺼비집이라도 확 내려버릴까 싶다. 생애 딱 한 번이라도 푹 자고, 예쁜 꽃 피우게 따스한 손베개를 해주고 싶다.

3. 사무실용 렌즈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노안은 벌써 진행되었지만, 어중간한 거리는 초점이 맞지 않는다. 컴퓨터 화면을 볼 때 특히 그러하다. 1시간 이상을 견디기 어렵다. 결론부터 말하면 참 딱하게 살았다. 무지의 소치다. 다초점 렌즈에 적응하기 힘들어 포기한 적은 있었지만, 2미터 안팎은 아주 잘 보이게 하는 사무실용 렌즈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물론 안경을 번갈아 끼는 불편함이야 충분히 감수할 만큼 잘 보인다. 그런데 그 2미터 안팎이 참 절묘하다. 그 거리를 벗어난 사람이나 사물은 희미하다. 한 달 정도 지나니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 일할 때는 2미터를 벗어나지 말고 집중할 것! 차라리 창밖이 흐릿한 게 다른 상념이 끼어들 틈이 없다!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리고 그리운 것은 늘 가슴 속에 담아두자! 라고, 돌아온 새봄과 함께 적응하였다.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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