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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벚꽃 필 때 죽음을 생각하라- 장석주(시인)

기사입력 : 2024-03-21 19:34:11

통영은 3월 중순에 벚꽃이 피고, 날마다 조금씩 북상한다. 열흘쯤 뒤엔 서울 여의도 윤중로 일대에서 벚꽃은 팝콘처럼 만개한다. 나는 벚꽃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다가 탄식한다. 어쩌자고, 하얀 벚꽃은 벚나무 검은 가지 속 어디에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만개하는가! 봄비가 지나가며 꽃잎을 떨구면 봄은 파장이다. 꽃 진 벚나무 가지에는 연초록의 잎들이 돋아난다. 제국이 멸망하듯이 벚꽃은 무너지는데, 하얀 벚꽃 시체가 낭자하게 흩어진 길을 걷노라면 가슴은 슬픔으로 벅차오른다.

젊은 시절, 연락이 끊긴 후배가 머리를 삭발하고 잿빛 승복을 입고 나타나 놀란 적이 있다. 스님으로 변신한 후배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말을 잃었다. 그는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을 끌어안고 번민했노라고 말한다. 인생의 알 수 없음, 그 수수께끼를 품고 출가를 감행한 후배는 곧 수행을 하러 미얀마로 떠난다고 한다. 후배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떠올렸다. 살아 있는 동안 멈추지 말고 죽음을 생각하라!

‘프록시마 센타우리’는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다. 우주 탐사선 보이저 2호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비행해 이 별에 도착하는 데는 약 2만 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보이저 2호의 속도는 총알보다 10배 더 빠르게 날아간다. 지구 행성에서는 날마다 몇만 명이 태어나고, 먼저 이 별에 왔던 몇만 명이 생로병사를 겪으며 죽는다. 2만 번의 봄이 왔다가 가는 동안 전쟁 고아들은 굶주리며 거리를 헤매고, 유기묘 수만 마리가 먹이를 찾아 사방을 돌아다닐 것이다.

우리가 살아서 사랑을 하고 가족을 꾸리는데, 나는 당신을 연모하고, 당신은 내 이마를 차가운 손으로 짚을 것이다. 우리는 길흉화복을 겪으며 평생을 살 테고, 그동안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오고, 폭풍과 뇌우는 우리 어린 자식들을 무서움으로 떨게 할 테다. 우리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해마다 어김없이 봄이 돌아오고 이토록 아름다운 봄날에 모란과 작약이 핀다는 것이다. 당신이 봄날의 백일몽에 잠겨 있는 동안 내 후배는 미얀마의 오지를 걸으며 탁발 수행에 정진할 테고, 보이저 2호는 무서운 속도로 우주를 가로질러 날아갈 테다.

아이들이 청년으로 자라고 어머니들은 늙어 허리가 굽고 백발로 변한다. 세상엔 얼음 위에 엎드려 잠든 사람도 있고, 파업을 위해 나선 노동자도 있고,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사랑하는 연인들도 있을 테다. 내게는 괴로운 밤들도 두어 번은 지나갈 테고, 누군가는 제 잇속을 챙기려고 친구를 배신하고, 누군가는 불시에 찾아든 질병으로 비탄에 빠질 것이며, 벚나무들은 봄마다 벚꽃을 피우느라 바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게 무시로 변하며 순환할 테지만 피었던 것은 지고,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법칙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테다. 우리는 대지가 죽음을 어떻게 양육하는지를 지켜보았다. 분명한 사실은 지구에서 동식물들은 죽음을 주기 삼아 순환한다는 점이다.

어느 날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내 죽음을 자각한다. 무심히 버스 창밖의 간판들을 스쳐지나가던 그 선험의 찰나, 나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 갇힌 채 오도가도 못 하는 느낌이었다. 만물을 이루는 원자는 죽은 상태로 존재한다. 별, 우주 먼지, 암흑물질, 바닷가 모래, 바위 들은 다 무생명이다. “우주는 죽음으로 충만하다.”(감상욱,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죽음으로 충만한 이 삭막한 우주에서 우리가 살아서 존재한다는 게 기적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기적일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죽음에는 출구도, 빠져나갈 샛길도 없다. 죽음이 지구 생물의 역사에서 상수이자 보편의 진리라는 점은 단 한 점의 의혹도 없는 진실이다. 당신과 나는 어쩌다가 봄마다 모란과 작약이 꽃피는 걸 보는가? 어쩌다가 저토록 아름다운 벚꽃이 덧없이 지는 걸 봐야 하는가? 벚꽃 필 때 당신의 죽음을 생각하라! 죽음이여, 나를 만나려거든 부디 벚꽃 핀 봄날에 찾아오라! 나는 활짝 웃으며 너를 맞으마!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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