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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인생의 드라마, 삶을 재현하는 느림의 미학- 장민지(경남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기사입력 : 2024-03-25 19:18:53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술은 보편적인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세계는 넓고 무궁무진하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동시에 낯선 이야기들은 많은 대중들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어렵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소재 중에서도 특별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야말로 성공적인 스토리텔링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 소재 중 하나는 바로 사랑이다. 역사적으로 ‘사랑’은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주목하는 소재이자, 가장 많은 종류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랑 이야기에 울고 웃으며,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의미를 찾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TV 드라마는 우리에게 친숙한 매체로, 보편적인 소재인 사랑을 다양하게 그려낸다.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와 같은 OTT가 대중화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TV 안의 드라마는 우리의 일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특별한 매체이자 텍스트다.

드라마가 TV 안에서 그려지고 끝을 맺는 동안 시청자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경험과 감정의 일부를 찾는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 드라마를 꼽기도 하고, 하나의 드라마를 여러 번 감상하기도 한다. 일상적으로 드라마는 인생에서 드라마틱한 순간들을 꿈꾸는 이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또 자신의 경험을 드라마에서 읽어낼 수 있게 만든다.

현재 한국에서 제작되는 드라마들의 라인업을 살펴보면 대중의 욕망을 읽어낼 수 있는 기제들을 찾을 수 있다. 최근에 많은 드라마가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의 소재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는 것, 그리고 회귀나 빙의, 환생과 같은 시간대를 움직이는 장르에 대한 소구가 높다는 점 등은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그려내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무엇보다 느린 호흡으로 진행되는 드라마와 같은 서사장르보다 예능이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대중들이 콘텐츠를 이용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으로 읽힐 수 있다. 미디어에 늘 접속할 수 있게 된 이용자들은 분절된 시간을 활용해 콘텐츠를 이용한다. 이동하는 도중에, 집안일을 하다가, 혹은 과제를 하면서도 사람들은 콘텐츠를 이용한다. 그렇다 보니 연속적이면서도 높은 집중도를 요구하는 드라마와 같은 서사구조보다, 분절되고 언제 어디서든 시작해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짧은 호흡의 콘텐츠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드라마는 많은 시청자들이 보는 콘텐츠 장르다. 드라마가 주는 기다림의 미학, 일상의 재현, 그리고 이로 인한 몰입은 다른 장르의 콘텐츠와는 차별화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드라마에 열광하고,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며 인생을 읽어낸다. 무엇보다 드라마가 대중들에게 주는 중요한 효과 중 하나는 ‘공통의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시대를 기억할 때,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 그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들과 이야기들을 기억하며 담소를 나누곤 한다.

요즘 그 어떤 때보다 많은 드라마가 쏟아져 나온다. 그야말로 이야기의 홍수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웹소설, 웹툰, 숏츠까지 끊임없이 이야기가 생성되고 빠르게 소멸된다. 이처럼 ‘이야기의 시대’에서 속도감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우리는 그만큼 이야기의 본질을 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야기는 만드는 사람에게도, 그 이야기를 듣고 보는 사람에게도 자신을 반추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조차 할 시간을 주지 않는 가속의 시대에서 이야기는 더 이상 우리에게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못할 수도 있다. 가끔은 일상적이고 느린 속도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닐까.

장민지(경남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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