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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복희- 남길순

기사입력 : 2024-04-04 08:19:09


복희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개가 일어선다


개가 걷고

소녀가 따라 걷는다


호수 건너에서 오는 물이랑이 한겹씩 결로 다가와

기슭에 닿고 있다


호숫가를 한바퀴 도는 동안

내 걸음이 빠른 건지 그들과 만나는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는데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먼저 지나가라고 멈춰 서서

개를 가만히 쓸어주고 있다


희미한 달이 떠 있다


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렇게 차분할 수 없다


☞이윽고 완연한 봄입니다. 벚꽃이 만개한 호숫가였어요. 바람이 불 때마다 서둘러 수면으로 떨어지는 꽃잎이 무척 안쓰러워 보였어요. 그런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호수 저편에서 시작한 ‘물이랑이 한 겹씩 결로 다가와’ 허둥대는 꽃잎을 기슭으로 가만히 데려다주었어요.

그때 “복희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정겨운 옛 친구 이름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어요. 시각 안내견 ‘복희’를 앞세워 한 소녀가 걷고 있었어요. 스치는 바람에 하염없이 꽃잎은 떨어지고……. 잠시 후 호수를 산책하던 소녀와 다시 마주했을 때였어요. 멈춰 서 가만히 개를 쓸어주며 먼저 지나가라는 듯, 소녀가 잠시 허공을 응시하는 것 같았어요. 따라서 바라다본 하늘에 희미한 달이 떠 있었어요. 오래전부터 눈이 멀었을 소녀도, 나도 함께 차분해지는 어스름 저녁이었어요. “복희야” - 천융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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