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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 먼지잼- 이현근(사회부 부국장대우)

기사입력 : 2024-04-16 19:31:25

봄인 듯싶었는데 벌써 여름인가 싶다. 눈부시던 벚꽃이 흩날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산천은 벌써 늦봄이나 초여름인 듯 연푸른 신록으로 덮이고 있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는가 싶었는데 30도에 달하는 한여름의 날씨가 훅 치고 들어오면서 이제 계절감도 무감해진다. 4월은 계절상 분명 봄인데 봄이라 부를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작별한다.

▼꼭 필요한 때에 내리는 적당한 비를 ‘쌀비’라고 한다. 봄비를 쌀비라고도 한다. 건조한 봄날을 진정시키는 봄비가 내리면 들판에 생기가 돌고, 본격적인 봄 농사가 시작되면 논에 물 대기도 좋아져 모내기에 도움이 되고, 풍년이 들게 한다고 한다. 필요한 때에 알맞게 오는 쌀비를 다른 말로는 ‘단비’라고도 하고, 농작물의 성장에 맞춰 내리는 비를 ‘꿀비’라고도 한다.

▼봄비는 작물의 생육에 도움이 돼 농사와 관련해 마냥 좋은 뜻으로만 알려졌지만 지나치면 해롭다는 뜻을 포함하는 속담도 있다. ‘봄비가 잦으면 돌담만 배부르다’는 속담이 있다. 과하면 쓸데없다는 뜻이다. ‘봄비가 많이 오면 아낙네 손이 커진다’는 속담도 있다. 이는 아낙네들이 봄비가 많이 오면 농사가 잘돼 풍년이 들 것이라고 미리 믿고 많이 베풀고 인심이 후해진다는 것으로, 오히려 이롭지 않다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은 그의 시 ‘봄비’에서 ‘어느 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 날/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그의 시처럼 봄비는 희망이자 믿음이다. 우린 쉽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고 말하지만 봄비처럼 쌀비처럼, 꼭 필요할 때 내리는 비처럼 살기는 쉽지 않다. 그저 먼지나 잠재울 정도의 먼지잼만 되어도 될 것 같다.

이현근(사회부 부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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