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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캐빈의 산책- 김나리(작가)

기사입력 : 2024-04-25 19:34:26
김나리(작가)

이웃집 캐빈은 하루에 두 번 산책을 간다. 캐빈은 제주 중산간 시골 마을에 사는 개다. 마을의 다른 개들은 사람이 사는 집을 지키거나 사람이 키우는 말을 지킨다.

부탁을 받는 날엔 내가 캐빈을 데리고 나간다. 이웃집 대문을 나서면 십중팔구 감자가 짖는다. 감자는 캐빈과 싸운 적이 있는 옆집 개다. 언젠가 캐빈 주인이 “내가 잘 붙잡지 못해서 캐빈이가 감자를 공격했어.” 라고 했다. 그 감자였다. 내가 캐빈과 지나가는 것을 본 감자 주인은 내게 말을 걸었다. “우리 감자가 성격이 사나워요.” 감자 주인은 캐빈이 다친 게 미안한 마음을 내게 말했다. 나는 캐빈 주인도 감자에게 미안해하고 있다고 하려다, 오히려 감자 들으라는 듯 말했다. “캐빈이도 산책하다가 다른 개 공격하는걸요.” 나는 감자에게 좋은 개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리막길로 들어서면 개들이 짖는다. 셋이서 대여섯 마리쯤 되는 어린 말을 지킨다. 나는 팔을 들어 개와 말에게 힘껏 손을 흔들어 보인다. 말들은 인사하러 다가오고, 짖던 개들은 눈빛이 스르르 풀린다. 귀엽게 생긴 한 마리는 대장인지 충실히 짖는다. 험하게 생긴 개는 나를 보면 짖어야 하는 임무를 잊는다. 캐빈은 그곳을 지날 때면 괜히 뜸을 들인다. 나는 말 지키는 개들과 인사를 더 나누며 잠시 시간을 보낸다.

캐빈은 가파른 오르막길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왼쪽으로 난 숲길이 좋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귤 농장 가는 길에 양배추밭이 있고, 마치 야외 미술관처럼 곳곳에 마네킹이 세워져 있다. 마네킹 허수아비다. 거기 가면 동네에서 제일 멋진 말이 내게 다가와 고개를 내밀어준다. 하지만 캐빈은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려 하는 나를 모른 척하며 오르막길을 바라본다. 나는 대개 캐빈 말을 들어준다.

캐빈을 따라서 오르면 바다가 보인다. 육지로 향하는 제주의 바당*이다. 저 바당에 육지로 가는 다리를 놓아주려다 말았다는 제주신화의 설문대할망 생각을 하다, 하릴없이 섬이 된 제주에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탁 트인 풍경에 감탄하려는 찰나에 캐빈은 노루를 찾아내고 달려간다. 나는 캐빈을 놓친 적이 없다. 캐빈이 노루를 다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오르막길을 오를 때면 산책줄을 짧게 줄여 잡는다. 그리고 높은 곳에 서서, 가까이서 만나지 못한 동네 멋진 말에게 손을 흔든다. 말은 풀을 뜯다가 멈추고 내게 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마워, 말!” 캐빈은 말이 달리는 모습에 감탄하는 나를 돌무덤이 여럿 모인 흙길 근처로 이끈다.

제주의 무덤은 검은 돌로 쌓은 네모난 담을 두르고 있다. ‘산담’이라 부른다.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에도 산담이 있어 그곳은 집이다. 캐빈은 산담을 넘어가려 하지 않고, 풀숲에 꿩이 숨어 있을까 살피느라 바쁘다. 나는 무덤에게도 나지막이 인사를 건넨다. “안녕, 제주 무덤.” 무덤은 움직이지 않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데, 그 위로 바람이 분다.

캐빈은 이제 더 놀고 싶어도 나를 한번 쳐다본다. “우리 오늘은 연못으로 가?” 나쁜 양반이 죽자 마을 사람들이 그 집을 허물고 땅을 파서 만들었다는 연못의 이야기가 적힌 석판을 읽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산담, 바당, 말, 개는 우리가 집에 가는 모습을 본다. 캐빈의 산책이다. *바당: 바다의 제주어

김나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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