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⑩ ‘교사 출신 소총수’ 최종겸씨
교단에서 전장으로… 백발의 영웅에겐 자부심이자 애국심
거제 부유한 가정서 학교 졸업 후 교사 생활
전쟁 초기 피란민 수용소로 변한 학교 관리
1951년 입대… 철원서 목숨 건 고지전 펼쳐
포탄 맞아 전사한 전우 목소리 아직도 생생
1969년 제대 후 향토방위 체제 확립 이바지
거제 하청면 ‘6·25참전기념비’ 건립 앞장
전우 복지에도 온힘… 경남보훈대상 수상도
“교사 꿈 못 펼쳤지만, 나라 지킨 자부심 커”
“어머니, 아들을 울면서 보내면 제가 못 살아옵니다. 웃으면서 보내셔야 제가 살 수 있어요….” 거제 출신인 최종겸(97)씨는 입대 전까지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의 꿈은 고향에서 우수한 학생을 배출하는 것이었지만, 전쟁 때문에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자유 대한민국을 구했기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멀리서 온다고 고생 많았습니다.” 지난 8일 거제 하청면. 제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백발의 영웅은 취재진의 손을 꼭 잡으며 반겼다. 최씨의 딸은 “아버지가 이른 아침부터 인터뷰를 준비하고 기다리셨다”고 전했다. 최씨가 이날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은 ‘살고 싶었다’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젊은이가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 있기까지 험난한 삶을 살아온 최종겸씨. 여러 차례 죽을 위기를 겪었지만, 100년 가까이 살아온 그에게 6·25전쟁은 ‘자부심’이자 ‘애국심’이었다.

최종겸 6·25 참전유공자가 거제시 하청면 자택에서 1952년 3월 ‘철의 삼각지’라 불리는 강원도 철원 고지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교단 떠나 포화 속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던 중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그해 8월과 9월 낙동강 최후 방어선인 마산에서는 미군과 인민군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주요 격전지였던 마산 진동면의 주민들은 거제로 피란을 많이 왔다. 그가 근무했던 칠천초등학교는 피란민 수용소가 됐을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임시로 피란민 수용소장으로 임명됐다.
“전쟁이 터지고, 진동면민들이 학교에서 피란 생활을 했지. 피란민들은 학교에서 불을 때 밥을 해 먹었기에 항상 화재 예방이 중요했어. 매일 순찰을 하며 화재 예방에 나섰지. 그해 10월에는 장티푸스병도 돌아서 고생도 많이 했어. 다행히 피란민이 떠난 10월까지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지.”
서울이 수복되고 남쪽 지역이 안정을 되찾자 다시 학교 수업이 시작됐다. 그는 인근 초등학교에 발령이 나 다시 교단에 섰다. 이후 1951년 11월 영장을 받고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영장을 받아서 입대한 것은 당시 그의 고향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입대 영장을 받고 하청면사무소에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붙잡고 한없이 울었다. 최씨는 8남매 중 막내이기에 어머니는 전쟁터로 가는 아들이 많이 걱정스러웠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꼭 살아와야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최종겸 6·25 참전유공자의 군대 시절과 학창 시절 사진.
◇“꼭 살고 싶었다”= 그는 제주도에서 기초 훈련과 하사관 학교를 수료했다. 그는 1952년 3월 치열한 고지전이 치러지고 있는 강원도 철원으로 투입된다. 그가 치른 전투를 ‘철의 삼각지’라고 부르는데 이는 철원과 김화, 평강을 잇는 삼각지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과 국도 5호선이 지나가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곳을 확보해야 중부 전선을 장악할 수 있었기에 아군과 적군 모두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렀다.
국군과 유엔군은 395고지와 철원평야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9사단은 일대에 주둔해 중공군 3개 사단을 맞았다.
“훈련소에서 교육받았지만, 막상 전투에 투입되니 진짜 겁났어.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살아나갈 수 있겠느냐는 생각뿐이었어. 선임들이 다 죽어 내가 가자마자 부분대장이 됐지.”
소총수였던 그는 고지를 향해 돌격할 때 최대한 지형지물을 많이 활용했고, 엎드려 기어서 갔다. 전투 경험이 없는 신병들은 일어선 채 돌격하다 바로 적 기관총에 맞아 전사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인민군들은 고지 위에서 기관총과 수류탄을 던지며 격렬히 저항했다. 적 공격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는 1시간 넘게 포복해 있은 적도 많았다. 인민군을 막기 위해 포병이 포 사격을 하면 아군은 방공호에 숨어 대기했다.
“강원도 높은 산을 포복해 올라가면 얼마나 힘들었겠냐. 고지를 올라가니 인민군 5명이 남아 있더군. 살기 위해서 그들을 쐈어. 아직도 생생해. 고지를 점령하고 이틀 동안 잠잠했다가 다시 적에게 뺏겼지.”
포탄이 비 오듯이 떨어질 때 전우 한 명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상을 당했다. “전우가 나한테 ‘친구야 살려줘’라고 해 호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분대장이 ‘죽고 싶냐. 너 나가면 죽는다’고 나를 잡았어. 결국 그 전우는 죽었는데,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나한테 살려달라고 한 게 지금도 머릿속에 안 사라져.” 그는 이 같은 고지전을 3개월 넘게 치렀다.
죽을 뻔했던 고지전을 치르고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생존’이었다. 그는 살기 위해 육군 보병학교에 입교를 신청했다. 교육 기간은 전투에 나가지 않으니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교육 기간 치열했던 전투를 피했고, 그는 살아서 휴전을 맞게 된다. 그의 소원이었던 어머니도 다시 만나게 됐다.
“당시 소위들을 ‘소모 소위’라고 불렀어. 금방 죽으니 소모품 같다고 해서. 솔직히 말하면 살려고 난 소위가 되려고 했지. 만약 그때 내가 보병학교에 안 들어갔으면 포탄에 맞아 죽었을 거야. 훈련 중 휴전 소식을 듣자마자 죽지 않았다는 생각만 들었어.”

최종겸 6·25 참전유공자가 거제시 하청면 자택에서 1952년 3월 '철의 삼각지'라 불리는 강원도 철원 고지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사비 털어 전우들 도와= 이후 그는 1969년 육군 대위로 전역했다. 그는 지난 1970년부터 15년간 거제 하청면 예비군 중대장을 맡으며 향토방위 체제를 확립하는 데 노력했다. 그는 중대장을 맡으며 젊었을 때 교육자의 꿈을 생각해 고향 청년들을 가르쳤다.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온 청년들에게 거제에 들어서고 있는 대기업 조선소에 취업하라고 다그쳤다. “당시 거제 청년들이 여름에는 멸치 배 타고, 겨울에는 번 돈으로 대다수 놀았어. 그래서 발전이 없었지. 청년들에게 조선소 취업을 하라고 했고, 많이들 일하러 갔어. 지금도 그때 나한테 교육받던 애들 만나면 많이들 고마워해.”
6·25참전기념비 건립추진위원장으로 추대된 그는 지자체 지원을 이끌어내 2002년 거제시 하청면에 기념비 건립에 앞장섰다. 또 사비를 털어 참전용사와 호국영웅들에게 위로 행사를 열어 노병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는 이 같은 공을 인정받아 지난 2018년 경남신문사 주최 경남보훈대상 특별 보훈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외도 그의 방에는 각종 표창장과 공로패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며 그는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그는 제대로 된 보훈이 있어야 나라가 지켜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6·25전쟁 때문에 내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나라를 지켰다는 데 자부심이 커. 하지만 정부에서 우리에게 너무 야속한 것 같아. 예우가 너무 적어. 우리가 이렇게 홀대받는 것을 젊은이들이 봤는데 전쟁이 터지면 총을 들 것 같아?”
이른 아침부터 인터뷰를 준비한 그는 취재진이 떠날 때까지 배웅했다. 연신 악수하며 ‘고맙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군사독재, 민주화 등 굵직한 한국 현대사를 직접 겪은 그는 이 나라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인터뷰해줘 정말 고마워. 정말 고마워. 신문에 나오고 사진도 멋지게 찍어주니 나라를 지킨 보람이 있네. 내가 우뚝 솟은 기분이야.” 그는 인터뷰가 끝나고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최종겸 6·25 참전유공자가 취재진과 인터뷰를 마친 후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있다.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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