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 만난 선생님] 퇴임 1년 앞둔 김준식 진주고 교사
‘파란만장’ 30여년 교육의 길… “교사는 내 운명”
경상대 법학과 졸업 후 한국은행 다니다
고향 진주 내려와 기간제 거쳐 정교사로
아이들 가르치며 전교조 활동하다 해직
1994년 기간제 복직 4년 후 정교사 되고
교육부서 학교정책 다루다 다시 학교로
2019년부터 4년간 지수중 공모교장 근무
임기 후 평교사로 학생들과 다시 부대껴
함께 공부하며 자격증 따고 결혼 주례도
퇴직하면 학당 열어 강의하고 책 쓰고파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며 우리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던 선생님들의 시대에서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갑질을 당하는 교권 추락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육현장에는 학생들만 바라보며 묵묵하게 한 길을 걷는 선생님들이 있다. 해직교사에서 교장으로, 다시 평교사로 평탄치 않은 30여년의 교직생활을 하고 내년 퇴임을 앞둔 김준식(63) 진주고등학교 선생님을 만나봤다.

30여년 교직생활을 마치고 내년 퇴임을 앞두고 있는 진주고 김준식 선생님.
◇한국은행 직원에서 교사가 되다= 김 선생님은 사범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 경상대학교 법학과를 다녔고, 졸업 후 한국은행에 시험을 쳐 입사했다. 일 년쯤 다녔을 때 부친의 병환소식을 듣고 병구완도 할 겸 싫증이 난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고향 안의로 내려왔다. 다행히 대학 때 교직과목을 이수해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서 기간제교사를 거쳐 또래보다는 늦은 1987년 정식교사가 됐다. 김 선생님은 “교직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준비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대학 때 B학점 이상이면 교직이수를 할 수 있는 혜택이 있어 해 놓았는데 이게 평생 밥그릇이 될 줄은 몰랐다”면서 “그런데 아이들하고 같이 있어 보니 이게 내 천직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해직교사에서 교육부 전문직으로= 김 선생님의 교직 출발은 여느 초임 선생님처럼 열성이었다. 시골인 안의고등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해보니 공부를 하지 않으면 학생들의 인생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아 무조건 대학에 보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매일 밤 11~12시까지, 주말은 물론 심지어 추석이나 설에도 독려하며 공부를 시켰다.
김 선생님의 말대로 학생들을 미친듯이 쥐어짜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좋은 성과로 연결되지 않았다. 좌절한 김 선생님은 또래의 젊은 선생님들과 매일 저녁 만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토론과 고민을 거듭했고, 다른 학교 선생님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김 선생님이 만난 다른 선생님들은 “세상이 부조리한데 대학진학만을 강요하는 것보다는 주변에 대한 시선을 바로 볼 수 있는 교육도 필요한 것 아니냐”는 의견에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된다. 이후 선생님들과 독서 모임과 평교사 모임도 하고 전교조 활동도 하면서 결국 해직까지 하게 됐다. 하지만 김 선생님은 1989년 전교조 창립 당시 대량 해직한 1527명에 속하지 않는다. 당시 사립학교에 재직하던 김 선생님과 동료 교사들은 눈에 띄지 않게 한 명씩 한 명씩 슬그머니 해직당하면서 같은 해직교사인데도 비공식(?) 해직교사였던 셈이다.
1988년 해직된 김 선생님은 1994년 복직은 되었지만 국가에서 복직시켜 주지 않으면서 정교사가 아닌 기간제 교사로 다시 교단에 섰고, 약 4년을 기간제로 근무하다 정교사가 되었다.
학교생활에 다시 적응하던 김 선생님은 학교 현장을 떠나 교육정책을 다루는 전문직 시험을 쳐서 교육부로 가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그렇게 5년가량을 학교정책을 다루는 전문직으로 있었지만 계속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각종 민원에 시달린 데다 부조리를 보면서 제 명에 살 수 없을 것 같아 다시 학교 현장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교장에서 평교사로= 인생은 뜻하지 않는 대로 흘러가기도 하면서 뜻하지 않은 삶을 살기도 한다. 2019년, 가까운 선배 교사가 진주 지수중학교 공모교장에 응모하기 위해 그에게 계획서 작성 등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은 묘하게 흘러갔다. 지인이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교장에 응모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에게 대신 나서 주라고 요청했다. 승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던 그였지만 학교관리자를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도전에 나섰다. 경쟁자도 많았고 마을 주민들도 원하는 후보가 따로 있었지만 블라인딩으로 진행한 그의 계획서가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교장이 되었다.
학교관리자인 교장이 된 그의 첫 행보는 학교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가 부임했을 때 2020년 지수중 입학대상 14명 가운데 13명이 진주시내로 진학하고 1명만 입학이 예정돼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침체해 있었다. 먼저 방치되다시피 칙칙했던 학교를 주변을 정리해 쾌적한 환경으로 바꾸었다. 예산이 없으니 공모신청을 많이 하기도 했다. 4년간 재직하면서 8~9개의 공모사업에 선정돼 학교운영에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러나 교장의 열정이 높으면 선생님들은 힘들다. 교장들의 흔한 출장도 잘 가지 않고, 늦게까지 남아서 업무를 처리했다. 재직기간 동안 밤 9시 이전에 퇴근한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코로나 기간에 버스로 학생들과 체험활동을 많이 다녔는데 체험학습을 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업무도 직접 하면서 선생님들의 일손을 줄였다. 교장이지만 수업을 하고 싶었던 그는 일주일에 90분씩 학생들과 대면했다. 처음에 학생이나 선생님들은 중간에 그만둘 것으로 의심했지만 솔선수범하는 한결같은 행동에 서서히 이해를 해줬다.
2023년 8월, 교장으로 임기를 마친 그가 다시 선택한 것은 평교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교장의 역할과 교사의 역할이 지극히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복귀했다. 교장이 되었다가 다시 교사로 돌아온 경우는 20%도 되지 않는다. 교장은 수업도 없고 출장도 많고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누릴 것이 많은데 다시 수업도 해야 하고 잡일도 많은 교사로 돌아가기 쉽지 않다”면서 “교사는 시간에 쫓기고, 교장은 시간을 쫓아간다고 생각한다”고 복귀의 변을 했다.
◇그래도 아이들 곁에서 영원한 선생님으로 = 평교사로 복귀한 그는 요즘 교장 때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받는다고 한다. 담임을 맡았고, 하루에 최소 3~4시간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능사 자격증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 농업계고와 공업계고에 재직하면서 자격증을 따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다못해 그들과 함께 공부해 자격증을 땄다. 그렇게 그는 용접과 밀링, 선반, 캐드, 요리 등 각종 기능사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특별한 것을 아이들에게 뭘 주자가 아니라 그냥 내가 열심히 하면 아이들이 따라온다”는 생각에서 다. 그는 제자들에게 ‘또라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학생들과 함께 부대꼈다. 그 결과일까. 지금까지 88번의 주례도 섰다. 주례는 대부분 제자들이 요청해서다. 신뢰와 존경이 없다면 자신의 스승을 주례로 모시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심지어 동료교사의 주례도 섰을 정도다.
교사로 전문직으로 교장으로, 학교 내에서 다양한 삶을 접한 그는 선생님이자 교육운동가로서 많은 글과 책을 써왔고, 강의를 통해 학교관리자나 교육정책에 대해 쓴소리와 제언을 해왔다. 그는 요즘 교권추락 등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옛날에는 교사가 학생에게 미치는 영향이 최소 70%는 되었는데 요즘은 50%도 안 된다”면서 “교장이나 교사 모두가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소신껏 당당하게 일을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퇴직 후 그는 그동안 가진 지식을 전하는 일과 교육운동 일을 평생 해왔으니 학당을 만들어 강의도 하고 책도 쓸 생각이다. 그는 지금까지 장자가 살아있다면 현대 서양 미술을 보고 어떤 느낌으로 감상할까를 상상해 펴낸 ‘장자, 오르세를 걷다’와 중학생들의 삶에 철학적 사유를 심어주기 위해 5권의 시리즈 중 2권을 발간한 ‘중학철학’의 저자이기도 하다. 각종 기관에서 장자와 도덕경, 서양미술관, 한시, 교육현안과 방향에 대해 100회 이상 강의를 하고 있으며, SNS와 브런치스토리 (https://brunch.co.kr/@brunchfzpe#info)에서 거의 매일 올라오는 그의 글을 읽어볼 수 있다. 교육현장에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열정은 멈추지 않는다.
글·사진= 이현근 기자 san@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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