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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항일운동 인정받나

사회주의 계열 이유로 조명 못 받아

열린사회희망연대, 경남보훈지청에

기사입력 : 2019-01-09 22:00:00


속보= 시민단체가 마산 출신의 여성 항일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는 포상 신청서를 국가보훈처에 제출, 처리 결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린 김 장군은 항일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2018년 12월 5일 5면 ▲“마산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김명시·명도석 흉상 건립하자” )

열린사회희망연대는 9일 김명시(金命時·1907~1949)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서를 경남동부보훈지청에 제출했다. 이 단체는 지난달 12일부터 김 장군의 형제·자매나 후손(친족)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이에 이순일 공동대표 명의로 신청서를 접수했다. 이 단체는 이에 앞서 지난달 4일 김 장군의 흉상 건립을 창원시에 요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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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희망연대 이순일(오른쪽) 공동대표와 김영만 상임고문이 9일 경남동부보훈지청에서 김명시 장군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를 제출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열린사회희망연대에 따르면 김 장군의 생가는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189로, 오동동 문화광장 무대 뒤편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오빠 김형선(1904~1950), 남동생 김형윤(1909~?), 여동생 김복수와 함께 자랐으며 1924년 3월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김 장군은 19세가 된 1925년 오빠가 가입한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가 유학생 자격으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하여 1년 반 만에 중퇴하고 중국 상해로 파견돼 대만·필리핀·베트남 등지의 독립운동가들로 ‘동방피압박민족 반제자동맹’을 조직했다. 그 뒤 1930년 5월 300여명의 조선인 무장대와 함께 러시아(당시 소련)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공격해 큰 타격을 줬고, 1932년 귀국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7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9년 신의주 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한 김 장군은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전쟁의 최전선인 화북지역에서 조선의용군 부대 지휘관을 맡아 일본 점령 지역에서 해방 전까지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해방 이후 ‘백마 탄 여장군’, ‘조선의 잔다르크’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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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항일운동가 김명시

열린사회희망연대는 1945년 12월 귀국한 김 장군은 조선부녀총동맹 선전부 위원으로 선출돼 활동했고,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좌익 숙청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뤄지면서 행적이 묘연하다가 1년여 뒤인 1949년 10월 부평경찰서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희망연대는 이어 당시 내무부 장관은 김 장군의 죽음과 관련 ‘자살’로 발표했다고 덧붙였다.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은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지만, 이데올로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과 역사 속에서 잊히고 감춰진 김명시 장군 같은 분도 이제는 합당한 재평가를 통해 명예회복이 되어야 한다”며 “김명시 장군의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어 반드시 서훈이 추서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안대훈 기자 ad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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