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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내로남불’의 나라- 이상권(광역자치부 서울본부장)

기사입력 : 2021-04-19 20:28:11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른바 ‘내로남불’ 전성시대다. 남에겐 엄격한 공정 잣대를, 자기 부정엔 눈을 감는 이중성의 본질을 꿰뚫었다. 묘사의 적확성은 문재인 정부를 저격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4·7 재보궐 선거를 분석하면서 “여당 참패는 문 정권 진보 인사들의 위선 때문”이라며 “한국에서 내로남불(naeronambul)이라 한다”고 보도했다. 한국 사회의 민낯은 먼 나라에서도 조롱감이 되고 부정적 이미지를 심었다.

선거 기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마저 한 술 거들었다. 재보선 투표를 독려하는 현수막에 ‘위선’, ‘무능’, ‘내로남불’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특정 정당을 쉽게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란 게 이유다. 특정 정당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정부 기관마저 이런 사실을 공식 인정한 셈이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내로남불’이란 말을 처음 쓴 이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으로 알려져 있다. 1996년 4월 11일 치른 15대 총선에서 여당인 신한국당은 139석을 얻었다. 새정치국민회의 79석, 자유민주연합 50석을 각각 확보했다. 과반의석에 실패한 신한국당은 야당과 무소속 의원을 영입해 151석으로 늘렸다. 국민회의는 야당 의원 빼가기를 맹비난했다. 남해·하동 지역구 3선이던 신한국당 박 의원은 6월 국회 본회의 신상 발언에서 “1995년 국민회의가(분당 과정에서) 민주당에서 의원 빼 간 것부터 따져보자”며 “자기가 부동산을 사면 투자요 남이 사면 투기이며 자기 여자관계는 로맨스고 남의 여자관계는 스캔들이라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고 맞받았다.

한글과 영어의 어색한 만남이 빚은 ‘정치 문법’은 문재인 정부에서 효용을 극대화했다. 조국 전 법무장관의 자녀 입시 비리 의혹이 공정 논쟁에 불을 지폈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2월 조 전 장관 부인의 입시 비리 관련 혐의를 모두 사실로 판단하고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외침은 구두선(口頭禪)으로 추락했다. ‘조로남불’의 비아냥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우리는 예외’라는 위선적 행태는 현 정권의 상징처럼 각인됐다.

편 가르기와 내로남불의 진영 논리는 민주당에게 4·7 재보선 참패를 안겼다. “내로남불의 수렁에서 하루 속히 빠져 나오겠다”(도종환 비상대책위원장)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당 주류와 강성 지지자들에게 조국은 ‘검찰과 맞서 싸운 순교자’다. 무엇보다 조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는 문 대통령 발언은 이 모든 사태를 관통하는 지침과도 같다. 친문계가 당정청 헤게모니를 장악한 정치지형은 조국 사태를 둘러싼 이견을 짓뭉갠다. 지난 16일 원내대표에 친문 핵심 윤호중 의원이 당선됐다. 새 원내지도부 대부분 문재인 정부 청와대 출신이다. 쇄신을 주장한 민주당이 결국 ‘민심’보다는 ‘당심’을 택했다는 뒷말이 나왔다. 진영 논리에서 자유로운 2030세대 초선 의원은 조국 사태의 본질을 ‘반칙과 특권’, ‘공정한 기회의 박탈’로 인식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친문 강성 지지층은 ‘배은망덕’, ‘초선 5적’ 등의 맹비난을 쏟아부었다.

재보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청와대를 떠난 한 인사의 퇴임사는 독선(獨善)의 결정판이다. “국민들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참으로 선한 문재인 정부”라고 했다. 무지몽매한 백성이 구중궁궐의 고매함을 몰라준다는 얘기인 듯하다. 악(惡)보다 더한 게 위선(爲善)이다.

이상권(광역자치부 서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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