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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청년, 그 어둡고 긴 그림자- 허충호(논설실장)

기사입력 : 2021-04-21 20:10:59

샤무엘 울만의 유명한 시 ‘청춘’은 두 가지 뜻을 갖는다. 피가 끓는 청년기의 무한한 저력을 설명하고 이를 더욱 북돋는 것이 하나다. 다음은 나약하고 무기력해 보이는 현재의 청년에 대한 질책이다.

울만은 청춘을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로 노래했지만 엄밀하게 얘기하면 그 시기는 물리적으로 정해진 시기일 수밖에 없다. 유행가 ‘아빠의 청춘’에서 말하는 그 청춘과는 약간 다른 시기라고 하는 게 맞을 성싶다. ‘때로는 이십의 청년보다 육십이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는 구절은 압권이 아니라 메타포어(metaphor)다.

육십의 청춘은 희망이자 의지이지만 이십의 청춘은 앞으로 살아갈 에너지를 가득 충전하는 시기라는 점에서 개념을 달리하는 게 맞다.

울만이 청춘을 ‘희망이란 파도를 타는 것’이라고 했다면 현재 한국의 청춘은 과연 어떤 파도를 타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마디로 청춘이 힘들다.

한국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올해 상반기 신규채용 계획은 그 청춘의 현주소를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매출액 500대 기업 가운데 63.6%는 대졸 신규 직원을 뽑을 계획이 없거나 채용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해 41.3%보다 22.3%p나 높다.

대기업이 채용을 줄인다면 올해 고용 상황이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지난 해 12월 기준 청년 실업률이 2018년 9.5% 이후 다시 9%대로 올라섰다는 통계청의 발표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현실은 모두가 잘 안다. 10명 중 4명이 실업 상태임을 보여주는 확장실업률은 현실을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본다.

청년의 직업 활동은 사회의 건강성을 비춰주는 거울이지만 미래 학자들마저 예측 못한 코로나 19까지 발호하는 현실에서 그 거울은 결코 맑지 않다. ‘벼락거지’와 ‘영끌’, ‘영털’, ‘LH반칙’, 청년들의 계층 역전, 실망, 허탈감, 과도기라는 용어들이 현 시대상을 상징하는 용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고 봐야 한다.

민간 기업을 포기한 청년 세대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학원을 전전하는 모습에서 왠지 오래된 흑백 영화를 되돌려보는 느낌까지 든다. 가계부채 1천 조 시대다. 빚쟁이들을 피해 높은 망루로 피신해 갚을 길 없는 빚을 걱정하는 중국 주왕의 모습을 빚댄 채대고축(債臺高築)의 사자성어가 현실로 나타날 경우 그 충격파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단순화의 함정’이라는 용어가 있다. 미국 신경생리학자 프란세스 로셔와 물리학자 고든 쇼가 “모차르트의 음악이 인간의 IQ를 높여준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자 언론이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똑똑해진다”는 식으로 그들의 연구 성과를 단순화했다. 소위 ‘모짜르트 효과 (Mozart Effect)’다. 하지만 쇼 교수는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다고 해서 영원이 똑똑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언론이 이 연구를 평가하는 과정에는 단순화의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년들의 구직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몇 푼의 지원금을 주고 일과성 일자리로 겨우 허기를 면하게 하는 현실은 모짜르트 효과를 답습하는 단순화의 오류다. 공공 일자리를 만든다고 하지만 대부분 ‘육십 청춘’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현실에서 이십의 청춘은 과연 무슨 희망의 파도를 기다리고 있을까.

으레 이맘때면 자주 등장하는 5자성어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하도 많이 인용해 매우 식상하기는 하지만 매년 봄이면 이 다섯 자를 대입해야 그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해가 많으니 그게 무척 안타깝다. 오늘의 청년, 그들에게 드리워진 길고 어두운 그림자는 언제 쯤이면 걷어질까.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무’라는데 그들의 꿈나무는 과연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이래저래 많은 의문만 드는 봄 같잖은 봄이다.

허충호(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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