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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승전보 위해 총칼 없는 전쟁 치렀죠”

[기획] 경남지역 6·25 참전유공자 (상) ‘후방 지원 업무’ 여성군무원

기사입력 : 2021-06-06 21:12:31

6·25전쟁 당시 후방지원 업무를 맡은 여성군무원과 자진해서 입대한 소년병의 희생은 국군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본지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당시 경남지역에서 활동한 여성군무원과 전선에 뛰어든 소년병 등 경남지역 6·25참전유공자를 만나 이들의 활약상과 예우 및 평가를 짚어본다.

경남지역 6·25 참전유공자는 총 4125명. 이 중 여성은 30명에 불과하다. 여성 유공자들은 6·25전쟁 당시 해군 공창(병기 제작·수리 공장), 국방부 조병창(무기 제작·보급) 등에서 타자수, 교환원, 출납원 등 지원 업무를 맡으며 ‘총칼 없는 전쟁’을 펼쳤다. 현재 해군기지가 있는 진해를 중심으로 7명의 여성 유공자 모임이 구성돼 있다. 6일 이들 중 3명의 유공자를 만나기 위해 창원 진해역 근처 조순옥(88) 유공자의 자택을 방문했다.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니 조순옥, 조창연(87), 김영희(91) 유공자가 반갑게 맞았다. 평양 순안, 일본 히로시마, 통영 등 각각 태어난 곳은 다르지만 71년 전 6·25참전 용사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와 땀을 흘린 이들이다.

조순옥·조창연·김영희 유공자
당시 해군통제부·국방부서
출납·교환·타자수로 국군 지원
2008년 뒤늦게 유공자 등록
“많은 유공자 인정 못받아 아쉬워”

6·25 참전유공자인 김영희(왼쪽부터), 조창연, 조순옥씨가 6일 오후 창원시 진해구 조순옥씨의 집에서 작년 2월 이후 처음으로 만나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김승권 기자/
6·25 참전유공자인 김영희(왼쪽부터), 조창연, 조순옥씨가 6일 오후 창원시 진해구 조순옥씨의 집에서 작년 2월 이후 처음으로 만나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김승권 기자/

◇조순옥 유공자(해군통제부 출납원)= “6·25전쟁 넉달 전만 해도 평양 순안에서 여섯 식구와 살고 있었어. 중공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아버지와 잠깐 서울로 피난 갔는데 그게 생이별이 될지는 몰랐지. 해군 장교로 입대했다는 오빠를 만나러 한 달간 서울까지 피난 행렬을 따라 걸었고 어쩌다 보니 진해까지 와서 어렵게 일을 시작했지.”

조순옥 유공자는 1951년 진해 해군통제부 공창 출납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가 맡은 주 업무는 공창 군인·직원들의 봉급을 계산하고 나눠주는 일이었다. 봉급날이 되면 가마니에 수천명의 봉급을 담아 놓고 각 부서 반장들에게 100여명분의 봉급을 전달했다. 국가 예산이기 때문에 봉급 지급에 단 하나의 실수가 있으면 안 됐고, 철저하게 맡은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2008년 참전유공자로 등록됐다. 유공자 등록이 늦어진 이유는 당시 해군 통제부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로부터 유공자 조건에 해당한다는 연락을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 자신의 행동이 국가에 기여했음을 인정받아 기쁘다면서도 유공자 등록 과정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고 했다.

“그동안은 내가 참전했다는 생각조차도 해본 적이 없었지. 그런데 수천명 군인들의 생활을 돕는 것도 전쟁의 한 부분이었던 거라. 난 당시 한반도에 있었던 국민 모두가 참전용사라고 생각해. 그런데 모두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스스로 신청해야 하고 공헌했다는 점이 증명돼야 하는데 아직도 몰라서 유공자 신청을 못 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꼭 해서 다 인정받아야지.”

그는 부부 참전유공자다. 공창 출납원으로 근무할 당시 참전용사 김대련(92)씨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김대련씨도 전쟁을 앞두고 고향인 평안남도 진남포를 떠나 이남으로 향한 실향민이다. 부부에게 6·25전쟁은 이별의 아픔이다. 71년이 지난 현재 그는 평양 순안에 10살, 12살 아래 동생들이 살아있을 거라고 믿으며 통일을 바라고 있다.

6·25전쟁 여성참전유공자인 김영희(왼쪽부터),조창연,조순옥씨가 6일 오후 창원시 진해구 조순옥씨의 집에서 작년 2월이후 처음으로 만나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김승권 기자/
6·25전쟁 여성참전유공자인 김영희(왼쪽부터),조창연,조순옥씨가 6일 오후 창원시 진해구 조순옥씨의 집에서 작년 2월이후 처음으로 만나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김승권 기자/

◇조창연 유공자(해군통제부 교환원)= “1945년. 당시 13살일 때 일본 히로시마에서 학교를 다녔어. 어느 여름날 하늘에서 미군이 ‘삐라’(전단)를 뿌리더라고, 원자폭탄이 떨어진다고 멀리 도망가라네. 안 믿는 사람도 있었는데 우리 가족은 도망갔어. 일주일 뒤 원자폭탄이 투하됐지. 이후 일본 내에서 한반도에서 큰 전쟁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해. 그럼에도 광복 소식을 듣고 바로 부산으로 향했어.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잖아.”

기대감에 부풀며 조국에 도착했지만 귀환 동포에 대한 부산지역 시민들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조창연 유공자의 가족은 일본인이 거주하던 빈집에 자리 잡았지만 일부 청년들이 들이닥쳐 문패를 떼며 길거리로 내몰아 부모의 고향인 진해로 이동해 간신히 정착할 수 있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학교에 다니다 1950년 해군통제부 군무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해 첫 일은 교환대에서 교환원 업무를 맡았다. 이어 해병대 사령관실 및 부관실로 자리를 옮겨 보좌 활동을 맡았다.

참전유공자 신청은 2008년 해군교육사령부에 직접 했다. 증명 과정은 까다로웠는데 58년 전 군무원으로 근무할 당시 만났던 참모 명단을 줄줄이 말하자 담당자가 놀라워하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한다.

그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참전유공자가 많다며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해군 통제부 근무 당시 많은 여성들이 있었는데 유공자 신청자는 많이 없는 것 같아. 다 공로 인정받고 포상도 받았으면 해.”

◇김영희 유공자(국방부 제1조병창 타자수)= “일본에서 16살 때 통영으로 넘어왔는데 식구가 많아 바로 일터로 나가야 했고 영문, 국문, 한문 타자기를 배웠지. 부산 영도에 있는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둘 때쯤 6·25전쟁이 발발했어.”

1951년 1월 부산 서면에 거주하던 그는 집 옆에 있는 국방부 제1조병창 보급과 타자수로 채용됐다. 조병창은 보급과 총 타자수만 5명일 정도로 꽤 큰 규모로 운영됐다.

그가 맡은 업무는 재료가 들어오고 무기가 나가는 명세를 공문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국가 기밀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출퇴근 시에 몸수색이 엄중하게 진행됐다. 내부 비밀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고 사상교육도 검증받았다.

김영희 유공자는 1년 3개월간 조병창에서 근무했다. 이후 재무부 관재국에서 10여년 일하다가 진해로 오게 됐다. 이곳에서 조순옥, 조창연 유공자와 알게 됐고, 2008년 참전유공자 신청을 권유받고 2009년 등록을 마쳤다.

창원지역 여성참전유공자 모임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후 매월 월례회를 개최하고, 6·25전쟁 관련 행사 때마다 모였지만 지난해 2월부터는 코로나19 사태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김영희 유공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우린 이제 대부분 80~90대 고령이야. 나이를 이렇게 먹어도 1950년, 그때를 모두 기억해. 다들 총을 들고 있는, 타자기를 두드리는, 장부를 정리하는, 교환대를 만지는 자신의 손이 기억난대. 할 말은 이것뿐이야.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맞서 싸우던 국군뿐만 아니라 그 국군을 돕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김용락 기자 roc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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