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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지켜낸 전투 ‘잊힌 역사’ 발굴 중

[6·25전쟁 71주년 기획] 마산방어전투 격전지 서북산 유해발굴현장을 가다

기사입력 : 2021-06-24 21:14:18

6·25전쟁 71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마산방어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인 서북산 감제고지 유해발굴 현장을 찾았다. 45일 동안 5000여명의 전사자가 나온 마산방어전투. 특히 이곳은 고지전이 벌어지면서 산 정상의 주인이 19차례나 바뀌는 등 아픔을 겪은 역사의 현장이다.

마산 서북산 일대는 지난 7일부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주최로 4주간 전사자 유해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 작전은 단순히 전사자의 유해·유품을 찾는 것에 국한되진 않는다. 마산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45일간 치열하게 진행됐던 전투의 역사적 중요성을 재조명하기 위한 작업이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북산 감제고지에서 39사단 장병들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2작전사 유해발굴팀원들이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을 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북산 감제고지에서 39사단 장병들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2작전사 유해발굴팀원들이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을 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45일간 정상 19차례 쟁탈

전사자 5000여명 발생 현장이지만

전투 세부자료 부족해 조명 못받아


2007년부터 유해 80여구 발굴

유가족 DNA 없어 신원확인은 ‘0’

2주간 총탄 등 유품 500여점 발견


잊힌 전투 재조명 절실

규모에 비해 기념 전적비 2개 그쳐

전쟁·전적기념관 세워 연구·홍보를

◇숙영지 조성해 하루 8시간 발굴작업= 지난 23일 오후 2시 서북산(738m) 8부 능선에 위치한 감제고지 유해 발굴 현장. 과거 유해가 발굴됐던 호(壕)를 중심으로 30m 부근의 생토층(30㎝ 깊이)을 파헤치는 전면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경사면 아래에서 삽으로 흙을 파내기 시작한 장병 100여명은 전사자의 유해와 유품을 찾기 위해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산 아래 숙영지를 조성한 39사단 마산대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2작전사 유해발굴팀 등 총 130여명은 매일 오전 8시 산을 올라 오후 4시까지 8시간가량 발굴작업을 펼치고 있다.

올해 발굴 과정에서 현재까지 유해 추가 발굴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20종류 500여점의 유품이 발견됐다. 특히 한 지점에서 국군·미군이 사용했던 M1, 카빈탄과 북한군이 사용했던 모신나강탄이 혼재한 채 발굴됐다. 이는 이곳이 서로 뺏고 빼앗긴 치열한 격전지였다는 점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외에도 수류탄 안전핀, 박격포 날개, 전투화 등 전투 장비와 플라스틱 숟가락, 커피 봉투, 약병 등 보급품도 발굴되고 있다.

◇과거 5회 걸쳐 유해 80여구 발굴…신원 확인 0건= 서북산 일대는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진행됐던 마산방어전투 발생지로 국군·미군 1000여명, 북한군 4000여명이 전사(추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7년부터 5회에 걸쳐 진행된 발굴작업에서 서북산·야반산·옥녀봉 등에서 80여구의 유해를 발굴하는 성과도 거뒀다. 하지만 이 중 신원 확인이 된 유해는 단 한 건도 없다.

서종원 유해발굴감식단 발굴팀장은 “전사자 유해발굴작업을 통해 당시 조국을 위해 희생한 국군의 유해가 꾸준히 발굴되고 있지만 신원을 확인해 유가족 품에 돌아가는 사례는 많지 않다”며 “유가족들의 DNA 시료 등록에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산 점령됐다면 전쟁 패색 짙었다= 1950년 8월 1일 북한군 제6·7사단(2만명 추정)이 마산 방면에 불현듯 출현했다. 미군이 이들 2개 사단의 행방을 파악한 것은 하루 전날인 7월 31일 북한군이 진주를 점령한 직후다. 이 시기 국군·미군은 낙동강 상류 방어선 구축에 집중하면서 호남지역을 우회해 마산까지 전진한 제6·7사단에 대한 대처가 전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산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당시 마산은 육로·철로·수로가 모이는 교통 중심지였고 임시수도인 부산과의 거리도 50㎞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책 ‘마산방어전 루트를 찾아서’의 저자 배대균씨는 “이곳이 북한군에게 뚫렸다면 임시수도이자 UN군의 하역항만이었던 부산이 적의 손에 넘어가 우리나라의 역사가 바뀌었을지 모른다”고 설명했다.

당시 마산에는 미 제24·25사단 3개 연대와 국군 민기식 부대, 김성은 부대, 전투경찰 등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군은 이 병력으로는 북한군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 1일 상주에 주둔 중인 미 제25사단 전체를 급파시키는 등 추가 지원을 명령했다. 그렇게 마산방어전투는 시작됐다.

국군·미군과 북한군은 45일간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고사리 전투, 진동리 전투, 야반산 전투, 함안 중암리 전투 등에서 국군의 활약도 이어졌다.

전투는 8월 말 북한군이 서북산과 전투산 일대에 포격을 집중하며 총공격을 시작했지만 미 제25사단과 국군이 재탈환과 방어에 성공, 마산을 지켜내면서 9월 14일 종료됐다.

◇잊힌 전투, 재조명 절실= 마산방어전투는 45일의 기간과 총 전사자 5000명이란 피해 규모에 비해 6·25전쟁사에서 크게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전투에 대한 세부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방부, 해군, 해병대 등에서 출판한 문헌에도 마산방어전투는 단편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나마 마산방어전투를 어린 나이에 목격했던 배대균·손담씨 등 민간 전문가들이 현장 탐방과 발굴작업을 통해 자료를 생산·제공해 재조명에 힘쓰고 있다. 특히 배대균씨는 최근 미국 정부에 요청해 마산방어전투에 대한 기록을 확보해 번역 작업을 펼치고 있다.

마산방어전투 재조명을 위해서는 전쟁·전적기념관 건립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기념관을 세워 이곳을 중심으로 연구 및 홍보 활동을 펼쳐야 한다는 설명이다. 현재 마산방어전투를 기념하는 시설은 서북산 전적비와 해병대 진동리지구 전투전적비 등 2개 전적비가 전부다.

군 관계자는 “창녕에는 2주간 북한군과 미군간 사투를 벌인 박진전투를 기념하는 전쟁기념관이 있다. 마산방어전투는 박진전투보다 규모가 큼에도 기념관이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전상진 39사단 마산합포구 기동대장은 “마산방어전투의 중요성과 특수성을 알리기 위해 지자체에 전쟁·전적기념관 건립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김용락 기자 roc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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