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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6·25 최대 격전 ‘마산방어전투’를 아는가

기사입력 : 2021-06-24 21:25:34

조국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수많은 선열들이 붉은 피를 흘린 6·25가 발발한 지 어언 71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당시 낙동강 방어요충지에서 벌어진 전투는 북한군의 파죽지세에 밀려 패색이 짙었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낙동강 방어요충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이 창녕군 남지읍의 박진 지구와 마산의 진동 지구다. 이 중 진동 일대에서 벌어진 마산방어전투는 500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는데도 6·25전쟁사에서 크게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아쉬운 현실이다. 이를 일깨우기 위해 이곳에 전쟁기념관이라도 조성해 후대에 기록을 전해야 한다.

마산방어전투는 한국 육군과 해병대, 전투경찰대가 미 육군·해병대와 함께 수행한 작전이다.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아군·적군을 포함, 모두 500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치열했다. 진동리는 낙동강 방어 전선 중 최남단 전장이었다. 임시 수도였던 부산과는 직선 거리로 불과 50㎞ 거리로,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이런 역사에 남을 중요한 전투가 세부 자료 부족 등으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채 70여년이 흘렀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겨우 국방부 자료에 단편적으로 소개된 것은 군색(窘塞)하기만 하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도 3·15의거기념식에서 “경남이 낙동강 전선의 최후 보루로서 남하하는 적들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냈다”고 인정하지 않았나.

마산방어전투가 치열했던 마산 서북산 감제고지 일대에서 지난 7일부터 한 달간 전사자 유해 발굴 작전이 진행되고 있다. 단순히 전사자의 유해·유품을 찾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45일간 치열하게 진행됐던 전투의 역사적 중요성을 재조명하는 작업이다. 이 유해 발굴 작전을 계기로 마산방어전투 재조명과 연구·홍보활동을 위해서라도 전쟁·전적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군 관계자가 “마산방어전투는 박진전투보다 규모가 큰데도 기념관이 없는 점이 놀랍다”고 한 말을 상기했으면 한다. 이곳에 전쟁·전적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은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수많은 호국 영령들의 희생을 길이 새기고 그들의 넋을 위로하며 추모하는 방안 중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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