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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 희망 담은 첫 시집 안고 떠나다

평생 노동자로 산 조현근 시인

별세 이틀전 ‘더 아픈 사람아’ 펴내

기사입력 : 2021-08-01 21:11:08

평생을 노동자로 치열하게 일한 가장의 꿈은 시인이었다. 문학을 동경하던 그는 애처롭게도 생의 마지막 순간, 그토록 바라던 시집을 손에 쥐었다.

58세의 나이로 지난달 31일 별세한 고 조현근 시인은 부산기계공고 동문들의 도움으로 첫 시집 ‘더 아픈 사람아(도서출판 에세이문예)’를 냈다. 시집이 나온 지 이틀 만이다. 의사소통이 힘든 상황에서도 시인은 시집 가편집본을 보고 “아, 좋네”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창원을 터전 삼은 시인에게 지난 2017년 여름은 악몽 같은 계절이었다. 몸에 암세포가 있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간, 담낭, 담도, 췌장, 십이지장, 임파선 등을 잘라내는 대수술 끝에 새로운 삶을 얻었다. 절망 속에서 건져올린 희망은 시에 대한 열정이었다.

고 조현근 시인
고 조현근 시인

생사 갈림길에 놓인 시인에겐 매순간이 금쪽같았다. 생과 사에 천착한 시를 지으며 투병생활의 고단함을 지웠다. 극통의 시간 속에 피어난 시는 구절 구절 눈물겹다.

바쁘게 살다가/내몰려 도착한 곳은/병원입니다// 구백 리 서울 가는 길에는/휴게소가 열 개를 넘는데/오십 년 내 인생길에는 휴게소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넘어진 김에 쉬어가라 합니다// 그러나 병원은/쉬기 위한 휴게소가 아니라/얹혀서 찾아온 바늘이 너무 무서운/ 용한 어느 할머니집 같습니다//이제 이 집을 나가면/풍광 좋은 추풍령휴게소를 찾아/야외 탁자에 앉아/강원도 찰옥수수를 먹고/천안 삼거리 휴게소에서는/호두과자 한입 맛있게 먹을 참입니다 -‘휴게소’ 전문-

권대근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시 해설에서 “힘겨웠던 인생길을 서울 가는 길에 대비해 풀어낸 시다. 자신이 자주 가는 병원을 바늘이 무서운, 용한 어느 할머니집으로 비유해 표현함으로써 육신의 아픔과 그 앞에 선 자의 비애를 잘 드러냈다. 섬세함과 애련함이 함께 공존하는 그의 글 마당에 서면, 문체에서도 다정다감한 맛이 느껴진다”고 썼다.

고교 동기인 최석균 시인은 친구가 보내온 시를 읽고 놀랐다고 했다. 최 시인은 “어쭙잖게 시를 긁적이고 있는 나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고 쉬우면서도 울림이 있는 시를 쓰는 친구가 우러러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고 조현근 시인의 첫 시집 ‘더 아픈 사람아’에 수록된 시 어느 날.
고 조현근 시인의 첫 시집 ‘더 아픈 사람아’에 수록된 시 어느 날.

시집에는 청천벽력 같은 암 판정을 받는 과정과 꿈 이야기, 문병 온 친구가 남기고 간 봉투 이야기,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두려움과 헌신적인 희생을 감내하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살기 위해 일상의 밥과는 다른 병원밥을 먹는 이야기, 입원 중에 만난 나이를 초월한 환우와의 이별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살아있음의 증거인 따뜻함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시집을 읽는 내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장면 장면이 마음에 각인돼 감동이 뭉클 솟는다. 시집 속 삽화도 의미가 있다. 고인의 고교 동기 고 정이윤씨의 부인인 김정숙 화가가 남편을 먼저 보낸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

고 조현근 시인의 첫 시집 ‘더 아픈 사람아’
고 조현근 시인의 첫 시집 ‘더 아픈 사람아’

뼈와 살이 아스러지는 투병 중에도 창작에 대한 열정을 보이는 친구의 사정을 알고 고교 동기들이 시집 출간을 돕기로 했다. 남선희 시집 발간위원장은 “친구의 딱한 사정을 알고 서둘러 시집을 냈다. 정말로 착하고 좋은 친구였다. 시를 읽으며 친구들과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비보를 접한 최석균 시인은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을 기대했는데, 허망한 소식에 가슴이 아프다. 남겨진 시집을 알리는 것으로 친구를 추모하겠다”고 말했다.

정민주 기자 jo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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