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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⑫ 조홍제와 제일모직, 그리고 바둑

[2부] 여보게, 조금 늦으면 어떤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1956년 대구에 ‘제일모직’ 설립… 모직물 ‘골든텍스’ 첫 생산

기사입력 : 2022-01-21 08:06:47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섬유는 자연섬유와 인조섬유로 나눠진다. 자연섬유는 식물성섬유, 동물성섬유, 광물성섬유로 구분된다. 식물성섬유는 목화를 주원료로 하는 종자섬유와 아마, 대마 등의 껍질을 주원료로 하는 껍질섬유, 그리고 잎섬유로 나누어진다.

동물성섬유는 양모, 캐시미어, 낙타의 털에서 원료를 얻는 모섬유와 양잠업인 누에고치에서 얻는 견섬유로 구분된다. 견섬유를 실크라 한다.

모방업이란 털을 가공하여 털실을 만들고, 이 털실로 모직물을 짜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틀어 방직업이라 한다. 방직업이란 섬유를 원료로 실을 뽑고, 그 실로 직물을 짜서 표백하거나 염색하여 가공하는 공업이다. 기술의 발달로 화학적으로 섬유를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인조섬유이다. 레이온이나 나일론, 폴리에스터, 폴리우레탄 등이 있다.

제일제당 성공 후 면방직 사업 검토 중
정부의 모직업 제의에 독일 기술 선택
8개월 만에 공장 지어 제품 생산 성공

1960년 4·19로 ‘삼성’ 부정축재 기업 인식
산하 3개사 개편해 제일제당 사장 취임
1961년 5·16 때 이병철 대신 한 달간 수감

바둑 즐기던 조홍제 석방 후 6년8개월간
한국기원 이사장으로 바둑 발전 공헌도

만우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는 바둑을 좋아하였다.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사단법인 한국기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조홍제 회고록/
만우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는 바둑을 좋아하였다.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사단법인 한국기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조홍제 회고록/

# 조홍제와 제일모직 설립

삼성물산은 제일제당의 성공으로 다음 사업을 검토한 결과, 면방업 추진을 결정하였다. 공장설립 허가문제와 관련하여 정부 기관에 문의한 결과 면방업 대신 외국산에 의존하고 있는 모직업 계통 공장설립을 하면 허가를 해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조홍제가 정부로부터 제의를 받은 것은 목화에서 뽑은 실로 천을 짜는 면방직보다 기술이 진보된 모방직 공장이었다. 당시 한국은 양복지와 같은 고급복지의 생산은 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대부분 수입품으로, 이때 외국산 고급 양복지로 만든 옷을 입고 다닌 사람을 ‘마카오 신사’라 불렀다.

1954년 9월, 조홍제는 모직공장 건설 계획을 세우고 설비 구입 조사차 미국과 영국, 이탈리아, 서독에 직접 갔다. 조홍제는 일본 법정대학에서 독일 경제학을 공부하여 독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조홍제는 당시 최신예 기종을 보유한 독일의 스핀바우 회사를 선택하였다. 2차 세계대전 후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의 기술력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제일모직은 제일제당의 설립 경험과 재능 있는 직원의 확보 등으로 대구 북구 침산동에 8개월 만에 완공하여 1956년 5월 골든텍스를 첫 생산했다.

#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잇따르면서 나라 전체가 혼란과 위기에 빠졌다.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대통령도 하야하였다.

4·19 격동기에 군중심리는 전시경제의 극복과 어려움 속에 일구어낸 ‘삼성’의 성장을 오로지 부정축재로 성장한 기업으로 인식하였다. 국민과 언론은 허정 과도정부와 장면 내각의 정치안정과 부정선거 처리 문제, 그리고 부정축재기업의 환수가 최대 관심사였다.

1960년 11월, 삼성 산하 3개사의 임원 개편에 따라 조홍제는 제일제당 사장에 취임하면서 삼성을 대표하여 부정축재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그렇게 동분서주하면서 회사를 운영해 나가던 중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부정축재 기업에 대해 기업 경영자 11명을 부정축재자로 구속하였다. 당시 이병철 사장은 일본에 거주하고 있어 다른 기업인과 달리 구속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정부는 이병철을 삼성 책임자로 규정하고 귀국을 재촉하고 있었다.(2021년 10월 1일·8일, 이병철편 15·16편)

어느 날 부정축재를 조사하던 정부 수사관이 삼성에 찾아와 조홍제에게 최후 통첩을 하였다. “내일 정오까지 이병철 사장이 귀국하여 구속을 받게 하든가, 아니면 조홍제 사장이 수감되든가 양자 택일을 하라”고 하였다. 결국 조홍제도 마포교도소에 약 1개월 정도 수감되었다가 부정축재자로 구속된 11명과 함께 각각의 회사 벌과금 확정 통지서를 받고 교도소에서 풀려나왔다.

서울 만우기념관에는 창업주가 사용한 바둑판 등이 보존되어 있다./만우기념관/
서울 만우기념관에는 창업주가 사용한 바둑판 등이 보존되어 있다./만우기념관/
서울 만우기념관에는 창업주가 사용한 문방사우 등이 보존되어 있다./만우기념관/
서울 만우기념관에는 창업주가 사용한 문방사우 등이 보존되어 있다./만우기념관/

# 흑과 백의 조화 바둑

‘신의 한수’, ‘승부수를 던지다’, ‘긴박한 초읽기’ 등은 바둑에서 나온 표현이다. 가로 세로 42x45㎝의 나무판에 361칸을 만들어 흑과 백의 돌로 승부를 구분한다. 상대의 강한 곳을 침범하지 말라 등 바둑용어가 일상생활의 명언으로 인용되는 것도 많이 있다.

삼국지의 ‘관우’는 마취도 하지 않고 팔을 잘라내는 동안 ‘마량’과 바둑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공자와 맹자는 바둑을 두지 못하게 하였다. 조홍제는 할아버지 때부터 바둑을 좋아하였고 본인도 즐겨 두었다.

조홍제의 바둑 이야기를 엮어 보았다.

# 조홍제 조부의 바둑이야기

1921년 어느 날 조홍제가 함안 장터에 나갔다가 조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과감하게 상투를 잘랐다. 신식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다.

완고한 조부로부터 꾸중이 두려워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당에서 보내고 있는데 조부로부터 호출이 왔다. 사랑채 앞에 나가니 조부께서는 친구분과 마루에서 바둑을 두고 계셨다. 어떠한 꾸중을 할지 긴장하였지만 할아버지는 꾸중 대신 “어머니에게 가서 아침밥 챙겨 먹어라”하였다.

# 조홍제와 바둑이야기

함안 양심정에서 조홍제는 친구들과 가끔 바둑을 두었다. “아버님, 저녁 진지 드시러 가셔야죠.” 아들은 바둑판 곁에서 조홍제가 바둑이 끝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만 하였다. 그 기다림은 저녁을 지나 새벽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조석래가 초등학생 시절이던 1943년,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진주 매형집에 놀러 갔다가 아버지 호출을 받고 함안으로 되돌아 왔다. 큰누나 등 뒤에서 오금을 저리고 대문을 들어서는 아들을 조홍제는 못본체 하고 “그래 어머니한테 인사드리고 나가 놀아라” 하고 계속 친구와 바둑을 두었다.

효성그룹 회장 시절, 오후 1시경 돌아온다고 회사를 나간 후 밤 열시가 넘어도 소식이 없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어느 누구도 조홍제가 먼저 연락이 오지 않으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시절이었다. 밤 11시경 조홍제의 운전기사가 집으로 전화를 하였다.

“회장님은 지금 한국기원에 계십니다.”

# 한국기원 이사장 조홍제

5·16 군사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여러 곳을 부정축재와 탈세 기업으로 지정하였다. 당시 제일제당 사장이었던 조홍제는 약 1개월간 구속된 후 6월 29일 석방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인 1961년 7월 1일 취임하여 1967년 2월 23일까지 약 6년8개월간 사단법인 한국기원 이사장을 맡으면서 한국의 바둑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조홍제는 아마 5단의 실력이라고 알려져 있다.

산천재는 남명 조식께서 학문을 닦고 연구한 곳으로 산청군 시천면 덕산에 있다. 소나무 아래 신선이 바둑두는 그림은 400년 이상 된 벽화로 윤곽만 알아 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복원된 그림이다.
산천재는 남명 조식께서 학문을 닦고 연구한 곳으로 산청군 시천면 덕산에 있다. 소나무 아래 신선이 바둑두는 그림은 400년 이상 된 벽화로 윤곽만 알아 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복원된 그림이다.
산천재는 남명 조식께서 학문을 닦고 연구한 곳으로 산청군 시천면 덕산에 있다. 소나무 아래 신선이 바둑두는 그림은 400년 이상 된 벽화로 윤곽만 알아 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복원된 그림이다.
산천재는 남명 조식께서 학문을 닦고 연구한 곳으로 산청군 시천면 덕산에 있다. 소나무 아래 신선이 바둑두는 그림은 400년 이상 된 벽화로 윤곽만 알아 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복원된 그림이다.

# 남명 조식과 산천재, 바둑이야기

허권수교수의 저서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는 남명조식 선생에 관한 내용이다. 이 책 앞면에 산천재에 관한 옛모습 사진이 실려 있다. ‘산천재’는 남명 조식이 61세 되던 해 지리산으로 이사하여 제자를 가르친 곳이다. 산천재의 마루 천장에 3면의 벽화가 있다. 밭가는 모습의 벽화, 차 달이는 모습의 벽화, 그리고 또 하나가 바둑 두는 모습의 벽화이다. 약 400년 이상 된 그림이라 대체적인 윤곽만 알아볼 수 있지만 바둑두는 모습이 청아한 은자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조홍제의 한마디> 준비는 만전(철저)하게, 진행은 석화 같이하라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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