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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①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이윤석

“흥 넘치는 춤꾼으로 50년 놀았으니 이만하면 상팔자지”

기사입력 : 2022-05-03 21:34:34

‘고성오광대’ ‘밀양백중놀이’ ‘단청장’… 도내에는 노래와 춤, 기술 등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져 내려오는 많은 무형문화재가 있다. 그런데 무형문화재가 지금껏 살아남은 것은 이를 전승·보존시키기 위해 평생을 몸바쳐 온 기능보유자들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본지는 지역 문인들과 함께 매주 이들 기능보유자들을 찾아가 명인으로서의 삶과 세계관을 조명하는 ‘문인이 만난 우리시대의 명인’ 시리즈를 마련한다. 오는 11월까지 계속될 이번 시리즈는 이달균(시인), 김우태(시인), 김홍섭(소설가), 조평래(소설가), 홍혜문(소설가)씨 5명의 문인이 함께한다.


#화날 땐 말뚝이춤으로, 눈물겨울 땐 문둥춤으로

오광대엔 용서와 화해, 사랑이 있다. 반상 구분도, 남녀차별도 없는, 둥근 마당에서 노는 놀이가 그 뜻을 명료하게 말해준다.

국가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이윤석(73)은 1949년 고성군 마암면 명송마을에서 태어나 50년을 춤꾼으로 살아왔다. 전설이 된 고성 춤의 명인들로부터 전 과정을 전수받은 후, 한 생을 고스란히 이 연희에 바쳤다. 돌아보면 아득하다. 15년간의 보존회 총무, 26년간의 회장직을 이어오다가 2021년 1월, 마침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평회원으로 돌아왔다.

이윤석 ‘허튼춤’./고성오광대보존회/
이윤석 ‘허튼춤’./고성오광대보존회/

“큰 자랑은 못되지만 내가 좋아서 한 일이기에 후회도 미련도 없지요. 지족상락(知足常樂)이라고, 만족하면 즐거운 법이지요. 화날 때는 말뚝이춤을 추고, 눈물겨울 땐 문둥춤으로 놀았으니 이만하면 상팔자라 할 만하지 않소?”

보릿고개에다 전쟁이 와도 우리네 농촌엔 늘 놀이와 신명이 있었다. 들에 나온 소년은 밭고랑에 앉아 구름을 보거나 건넌 마을에서 불어오는 갯바람에 땀을 씻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꽹과리 소리에 심장이 뛰었고, 알지 못할 흥분으로 풍물패를 뒤쫓던 소년은 어느새 소고를 들고 흥에 젖어갔다.

추석은 물론, 농한기인 설날부터 보름날까지는 풍물놀이가 끊이지 않았다. 마암면에서 시작하여 개천면, 구만면, 읍내 등등으로 매구패를 따라다니다 보면 달포는 쉬이 지나간다. 소년은 소품을 날라주기도 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내오는 먹을거리에 절로 신바람이 났다. 그 시작이 춤꾼 한평생이 될지 그도 몰랐다.

1949년 고성 마암면 명송마을서 태어나
풍물패 뒤쫓다 1975년 본격 재인의 길 걸으며
문둥춤 등 고성춤 명인들에게 전 과정 전수받아
고성오광대 출발부터 현재까지 변화·중흥 지켜

전수 시작 이래 오광대 전수회관 수료자만 3만여명
끊임없이 오가던 전수생 줄어 명맥 사라질까 걱정
가족 단위 받아 오광대 진정한 멋 전수하고파

이윤석 ‘허튼춤’./고성오광대보존회/
이윤석 ‘허튼춤’./고성오광대보존회/
이윤석 ‘허튼춤’./고성오광대보존회/
이윤석 ‘허튼춤’./고성오광대보존회/

#농사는 업이요, 춤은 운명이다

신명은 한 사람의 운명을 변화시킨다. 60년대 초라니처럼 따라다니던 소년은 청년이 되었고, 1968년 결혼, 1975년 군 제대로 본격적인 재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 서울에서의 1년을 제외하고는 지금껏 고성을 지키며 살고 있다.

고성오광대의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더 먼 곳을 바라봐야 하겠으나 해방 후인 1946년 고성읍에 건립된 가야극장 개관을 중흥의 기점으로 보는 것도 좋으리라. 이는 마당극 놀이가 무대극과 병행하게 된 상징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김창후(원양반), 홍성락(문둥북춤), 전세봉(승무) 등에 의해 전해졌는데, 초창기 고성오광대를 이끈 춤꾼들이다.

그렇게 50~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 이르게 된다. 동해면 출신인 마을 어른 허판세(고성오광대 예기능보유자)는 당시 마암면에 살았는데, 매구패들은 그를 중심으로 자연스레 모여 풍물을 놀았다. 같은 마을의 정대식, 이영도, 허종원 같은 이들이 그들이었는데, 차츰 놀이가 격을 갖추다 보면 악기 다룰 사람과 허드렛일을 담당한 일꾼은 늘 부족한 법이다. 그래서인지 타고난 끼와 재주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허판세는 이윤석에게 정제된 몸짓을 가르치며 잠자던 신명을 일깨워 주는 동시에 놀이판의 중요한 일원으로 인정하게 된다.

고성오광대는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으면서 새롭게 성장 진화한다. 1973년엔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 1974년엔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연희를 대표하는 단체가 된다. 경연대회는 정해진 시간에 전 과장을 다 보여주어야 하므로 현재의 표준화 된 5과장 형식을 갖춘 계기가 되었다.

이윤석은 고성오광대의 출발에서부터 현재까지 변화와 중흥을 지켜온 증인이지만, 실제 그의 본업은 농사다. 흙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사람에 대한 믿음도 크다. 그러므로 그의 춤엔 고성 농투성이의 한과 환희가 묻어 있다.

운이 좋았다 할까. 스승들로부터 각종 춤을 배웠다. ‘만신의 피’라는 별호를 가진 허종복에겐 말뚝이춤과 기본춤을, 당대의 풍류객 조용배에겐 문둥춤과 승무를, 이윤순에게선 전 과정의 음악과 호흡의 조율을 익혔다. 허종복은 말뚝이춤에 양반을 향한 신랄한 풍자를 더 했고, 조용배는 문둥춤에 좀 더 짙은 향토색과 한을 담았으며 이윤순은 극의 체계를 공고히 다졌다.

이윤석은 이런 연행의 기본을 배우면서 스스로 길을 열었고, 1993년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었으며 1994년 보존회 회장이 되어 스승들이 떠난 고성오광대를 지켜왔다. 그리고 2003년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렇듯 고성오광대의 장점은 춤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세대 춤꾼들의 춤동작을 유실치 않은 춤사위가 좋은데, 이는 이윤석이 계승무(繼承舞)의 전형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이윤석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이윤석

가끔은 마당을 벗어나 무대 위에서 덧배기춤을 출 때가 있다. 이때는 탈을 벗고 관객과 마주한다. 키 크고 인물 훤칠한 사내가 추는 6박자 굿거리장단에 맞춰 연행되는 이 춤은 헌헌장부(軒軒丈夫) 냄새 물씬 풍기는 춤이다. 그의 덧배기춤은 남자가 남자에게 반할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한다.

#신명엔 피부색의 구별이 없다

1998년 10월,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명무초청공연’에서 선보인 덧배기춤은 활달하고 거칠면서도 자로 잰 듯한 품새, 감았다 풀고, 다시 풀었다 맺는 발걸음은 관객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다. 이날 이후 덧배기춤은 이윤석을 떠올리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이윤석은 “신명은 한국인만의 것만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2001년 코리아소사이어티 초청 미국 5개주(하와이, 뉴욕, 워싱턴, 필라델피아, 샌디에이고)공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무대와 객석이 구분된 서양식 극장이 배우와 관객이 하나되는 마당으로 변한 신명의 현장은 잊을 수 없다.

이때 만난 주디 반자일(하와이주립대학 교수)은 무용수와 무대가 한몸이 되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느낀 최고의 공연이었다며 칭송했다. 특히 하와이주립대학에서 행한 5주 워크숍은 말이 필요 없는 몸짓의 향연으로 맘껏 소통한 시간이었다고 술회한다. 또한 2004년 독일출신으로 ‘현대무용의 혁명가’라 불리는 파나바우쉬는 그의 춤에 반해 2005년 LG아트센터 개관 5주년 기념공연 ‘러프 컷(Rough Cut)’에 담았다.

#이윤석 명인은 말한다

“우리 춤 몸짓 중에 배김새라고 있습니다. ‘배김’이라는 것은 ‘칼을 뽑아 귀신을 후려친다’는 뜻입니다. 흔히 내리 배기다, 내리꽂다, 내동댕이치다 등의 비판 정신을 뜻하는데, 그게 바로 고성오광대의 정신이며 지향하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1974년 전수를 시작한 이후부터 일년에 약 1500명의 수료자를 배출했는데, 20년을 곱하면 약 3만명 정도가 이곳을 거쳐 갔다. 이렇듯 오광대 전수회관은 거대한 민속대학이요 고성을 알리는 핵심 공간이다.

이런 그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걱정이 있다고 한다. “전수회관에 끊임없이 오가던 전수생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대학동아리들이 없어지면서 전문 춤꾼의 명맥이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서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하여 가족 단위의 전수생을 받아 고성오광대의 진정한 멋을 전수하고 싶습니다.”

이달균(시인)
이달균(시인)

이달균 (시인)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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